명씨의 시조는 중국 중경(重慶)에 대하국(大夏國)을 건국하였던 명옥진(明玉珍)황제이다. 시조는 1329년(己巳年) 9월 9일 지금의 중국 호북성 수주시 수현 유림진에서 탄생하였다. 신체가 장대하고 천성이 영특하였으며 무예가 뛰어나 말위에서 활을 잘 쏘았다. 아홉살 때부터 경학(經學)과 병서(兵書)에 능하였고, 당시 몽고족의 원(元)나라에 의해 지배되고 있던 중국을 되찾겠다는 큰 뜻을 품고 주색이나 재물을 탐하지
않았다.
시조는 원나라의 국운이 기울어 도처에서 영웅들이 떨쳐 일어나 군웅할거하던 1350년(庚寅年)에 서수휘(徐壽輝)가 기양(蘄陽)에 송(宋-*960년 조광윤이 세운 宋과 구분)을 세우자, 다음해 서수휘 휘하에 들어가 촉(蜀, 사천성) 지방을 중심으로 많은 전공(戰功)을 쌓고, 여러 관직을 거친 10년후, 표기위상장군롱촉행성좌승상(驃騎衛上將軍隴蜀行省左丞相)의 벼슬을 제수 받았다.
시조는 서수휘가 진우량(陳友諒)에 의해 살해되자 중지(衆志)에 따라서 1361년(辛丑年) 10월 15일 중경(重慶)에서 국왕의 자리에 올라 宋의 국호와 연호를 그대로 사용하다가 1363(癸卯年) 정월 초하루 황제로 등극하여 국호를 대하(大夏)로, 연호를 천통(天統)으로, 책력을 선천(先天)으로 하고 예악(禮樂), 형정(刑政), 기강법도(紀綱法度)를 완비하였다.또한 시조는 마음이 어질고 자애로워 백성들을 위해 세금을 대폭 줄이고,
과거를 실시하여 인재를 고루 등용하는 등 선정과 시책을 펼쳤다. 이에 민심은 모두 시조를 향했고 건국 4년 후 혼란했던 중국의 서쪽이 모두 평정되었다.그러나 시조는 애석하게도 1366년(丙午年) 2월 6일 신하들이 지켜보는 자리에서 병으로 붕어(崩御)하였다. 황제의 자리를 당시 10세인 황태자(皇太子) 명승(明昇)에게 물려주고, 황후 팽(彭)씨에게 후사를 부탁하는 조서(詔書)를 내렸으니, 그의 나이(天壽) 38세요, 재위(在位) 6년이었다.
시조가 세상을 떠나자 시호(諡號)를 흠문소무황제(欽文昭武皇帝)로, 묘호(廟號)를 태조(太祖)로 하고, 같은 해 9월 6일 보개산(寶蓋山)에 장례를 치루어 릉을 예릉(叡陵)이라 하였다. 이후 황태자 명승이 황제를 계승, 연호를 개희(開熙)로 바꾸고, 원나라를 멸망케 한 명(明:朱元璋 건국)나라와 여러차례 전쟁을 하다가 1371년(辛亥年) 황후 팽씨가 백성이 도탄에 빠질것을 염려, 나라를 내어 주자고 하여 명승황제가 이를
따랐다.
명나라 태조(太祖) 주원장(朱元璋)은 명승을 귀의후(歸義侯)에 봉한 후, 고려국에 보내면서 고려왕에게 명씨를 군인(軍人)으로도 삼지말고, 백성(百姓)으로도 삼지말라며(不做軍, 不做民), 저택과 노비를 내리라는 칙서(勅書)와 함께 1372년(壬子年, 고려 공민왕21년) 명승과 모후(母后) 팽씨를 배려하였다.
공민왕은 명승과 모후 팽씨를 개성 흥국사(興國寺)에 살게 하고, 연안, 백천 양현(兩懸)의 공물(供物)로 공봉(供奉)토록 하였다. 황후 팽(彭)씨는 부덕(婦德)을 고루 갖추고, 자수(刺繡)에 능하여 조선 이태조(李太祖)에게 용포(龍袍) 등 궁중 관복(宮中官服)을 지어 올렸고, 여인들이 입는 당의(唐衣)와 수식(首飾)을 고려에 처음으로 보급하였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명승을 화촉군(華蜀君)에 봉하고, 태종(太宗)은 충훈세록(忠勳世祿)을 내렸으며, 황후 팽(彭)씨의 묘를 숙릉(肅陵)이라 하여 국빈(國賓)으로서의 예(禮)를 베풀었다. 명승은 군부인(郡夫人) 파평 윤씨(坡平 尹氏)를 배위(配位)로 맞아 네명의 아들 명의(明儀) 자헌대부 자헌공(資憲大夫 資憲公), 명현(明俔) 가정대부 총랑공(嘉靖大夫 摠郞公), 명준(明俊) 가정대부 부사공(嘉靖大夫 副使公), 명신(明信)
통훈대부 시랑공(通訓大夫 侍郞公)을 두어 이로부터 명씨의 번연을 이루었다.명씨들은 조정의 예우를 받으며 여러 대에 걸쳐 평안한 생활을 해왔으나임진왜란으로 여러 곳으로 흩어졌다. 자헌공 후손들은 연안, 개성, 강진, 창원 등지로, 총랑공 후손들은 청양, 서천, 태안, 해남, 고흥 등지로, 부사공 후손들은 서울, 영변 등지로, 시랑공 후손들은 연안, 고흥 등지로 옮겨 살았다.
명씨는 2000년 통계청 조사결과에 따르면 2만8천 여명이며 성씨 순위로는 80위이다.명씨는 호적편제 시 본관을 연안(延安), 서촉(西蜀), 해주(海州), 성도(成都), 황해(黃海) 등등으로 신고하여 서로 다르지만 모두 같은 자손이다.명옥진황제의 릉인 예릉(睿陵)은 1982년 중경시 강북구 소재 직물공장 확장공사 중 발견되어 중경시 정부에서 명옥진 황제릉으로 조성하였다.
대하국 황궁터는 2010년부터 발굴작업이 시작되어 현재 그 일부가 발굴되었으며, 복원계획을 수립하고 한창 복원작업중에 있다.한국 명씨의 족보와 중국 명씨의 역사를 종합해보면 명씨의 역사는 중국 희성(姬姓)에서 비롯되어 후직(后稷), 오태백(吳太白), 중옹(仲雍), 백리해(白里奚), 맹명(盟明)으로 이어져 내려오다가 그 후손이 맹명의 이름인 명(明)을 성(姓)으로 사용하여 명씨가 되었다.
(2017.7.17. 보완 제작)
명씨의 시조는 중국 중경(重慶)에 대하국(大夏國)을 건국하였던 명옥진(明玉珍)황제이다. 시조는 1329년(己巳年) 9월 9일 지금의 중국 호북성 수주시 수현 유림진에서 탄생하였다. 신체가 장대하고 천성이 영특하였으며 무예가 뛰어나 말위에서 활을 잘 쏘았다. 아홉살 때부터 경학(經學)과 병서(兵書)에 능하였고, 당시 몽고족의 원(元)나라에 의해 지배되고 있던 중국을 되찾겠다는 큰 뜻을 품고 주색이나 재물을 탐하지
않았다.
시조는 원나라의 국운이 기울어 도처에서 영웅들이 떨쳐 일어나 군웅할거하던 1350년(庚寅年)에 서수휘(徐壽輝)가 기양(蘄陽)에 송(宋-*960년 조광윤이 세운 宋과 구분)을 세우자, 다음해 서수휘 휘하에 들어가 촉(蜀, 사천성) 지방을 중심으로 많은 전공(戰功)을 쌓고, 여러 관직을 거친 10년후, 표기위상장군롱촉행성좌승상(驃騎衛上將軍隴蜀行省左丞相)의 벼슬을 제수 받았다.
시조는 서수휘가 진우량(陳友諒)에 의해 살해되자 중지(衆志)에 따라서 1361년(辛丑年) 10월 15일 중경(重慶)에서 국왕의 자리에 올라 宋의 국호와 연호를 그대로 사용하다가 1363(癸卯年) 정월 초하루 황제로 등극하여 국호를 대하(大夏)로, 연호를 천통(天統)으로, 책력을 선천(先天)으로 하고 예악(禮樂), 형정(刑政), 기강법도(紀綱法度)를 완비하였다.또한 시조는 마음이 어질고 자애로워 백성들을 위해 세금을 대폭 줄이고,
과거를 실시하여 인재를 고루 등용하는 등 선정과 시책을 펼쳤다. 이에 민심은 모두 시조를 향했고 건국 4년 후 혼란했던 중국의 서쪽이 모두 평정되었다.그러나 시조는 애석하게도 1366년(丙午年) 2월 6일 신하들이 지켜보는 자리에서 병으로 붕어(崩御)하였다. 황제의 자리를 당시 10세인 황태자(皇太子) 명승(明昇)에게 물려주고, 황후 팽(彭)씨에게 후사를 부탁하는 조서(詔書)를 내렸으니, 그의 나이(天壽) 38세요, 재위(在位) 6년이었다.
시조가 세상을 떠나자 시호(諡號)를 흠문소무황제(欽文昭武皇帝)로, 묘호(廟號)를 태조(太祖)로 하고, 같은 해 9월 6일 보개산(寶蓋山)에 장례를 치루어 릉을 예릉(叡陵)이라 하였다. 이후 황태자 명승이 황제를 계승, 연호를 개희(開熙)로 바꾸고, 원나라를 멸망케 한 명(明:朱元璋 건국)나라와 여러차례 전쟁을 하다가 1371년(辛亥年) 황후 팽씨가 백성이 도탄에 빠질것을 염려, 나라를 내어 주자고 하여 명승황제가 이를
따랐다.
명나라 태조(太祖) 주원장(朱元璋)은 명승을 귀의후(歸義侯)에 봉한 후, 고려국에 보내면서 고려왕에게 명씨를 군인(軍人)으로도 삼지말고, 백성(百姓)으로도 삼지말라며(不做軍, 不做民), 저택과 노비를 내리라는 칙서(勅書)와 함께 1372년(壬子年, 고려 공민왕21년) 명승과 모후(母后) 팽씨를 배려하였다.
공민왕은 명승과 모후 팽씨를 개성 흥국사(興國寺)에 살게 하고, 연안, 백천 양현(兩懸)의 공물(供物)로 공봉(供奉)토록 하였다. 황후 팽(彭)씨는 부덕(婦德)을 고루 갖추고, 자수(刺繡)에 능하여 조선 이태조(李太祖)에게 용포(龍袍) 등 궁중 관복(宮中官服)을 지어 올렸고, 여인들이 입는 당의(唐衣)와 수식(首飾)을 고려에 처음으로 보급하였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명승을 화촉군(華蜀君)에 봉하고, 태종(太宗)은 충훈세록(忠勳世祿)을 내렸으며, 황후 팽(彭)씨의 묘를 숙릉(肅陵)이라 하여 국빈(國賓)으로서의 예(禮)를 베풀었다. 명승은 군부인(郡夫人) 파평 윤씨(坡平 尹氏)를 배위(配位)로 맞아 네명의 아들 명의(明儀) 자헌대부 자헌공(資憲大夫 資憲公), 명현(明俔) 가정대부 총랑공(嘉靖大夫 摠郞公), 명준(明俊) 가정대부 부사공(嘉靖大夫 副使公), 명신(明信)
통훈대부 시랑공(通訓大夫 侍郞公)을 두어 이로부터 명씨의 번연을 이루었다.명씨들은 조정의 예우를 받으며 여러 대에 걸쳐 평안한 생활을 해왔으나임진왜란으로 여러 곳으로 흩어졌다. 자헌공 후손들은 연안, 개성, 강진, 창원 등지로, 총랑공 후손들은 청양, 서천, 태안, 해남, 고흥 등지로, 부사공 후손들은 서울, 영변 등지로, 시랑공 후손들은 연안, 고흥 등지로 옮겨 살았다.
명씨는 2000년 통계청 조사결과에 따르면 2만8천 여명이며 성씨 순위로는 80위이다.명씨는 호적편제 시 본관을 연안(延安), 서촉(西蜀), 해주(海州), 성도(成都), 황해(黃海) 등등으로 신고하여 서로 다르지만 모두 같은 자손이다.명옥진황제의 릉인 예릉(睿陵)은 1982년 중경시 강북구 소재 직물공장 확장공사 중 발견되어 중경시 정부에서 명옥진 황제릉으로 조성하였다.
대하국 황궁터는 2010년부터 발굴작업이 시작되어 현재 그 일부가 발굴되었으며, 복원계획을 수립하고 한창 복원작업중에 있다.한국 명씨의 족보와 중국 명씨의 역사를 종합해보면 명씨의 역사는 중국 희성(姬姓)에서 비롯되어 후직(后稷), 오태백(吳太白), 중옹(仲雍), 백리해(白里奚), 맹명(盟明)으로 이어져 내려오다가 그 후손이 맹명의 이름인 명(明)을 성(姓)으로 사용하여 명씨가 되었다.
(2017.7.17. 보완 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