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 명옥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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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씨 시조 사적(明氏始祖史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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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씨 시조의휘(講 : 돌아가신 임금이나 높은 분의 이름)는 옥(玉)자 진(珍)자이고,

중국 대하(大夏) 태조(太祖) 흡문소무황제(欽文昭武皇帝)이시다.

 

시조께서는 1329년 9월 9일 중국 호북성 수주 수현 매구(지금의 수주시 유림진 고성판)에서 탄생하셨고, 신장이 8척으로 영특하시고 무예가 출중하셨으며 특히 말 위에서 활을 잘 쏘셨고 큰 뜻을 품으시고 주색이나 재물을 탐하지 않으셨다. 당시 중국은 몽고족이금나라와 송나라를 멸망시킨 후 원나라를 세워 백여 년 동안 통치하여 왔다.

 

그들은 잔혹한 민족 압박과 야만적 통치를 실시하였고, 북송 이후 토지의독점 상황은 매우 심각하였는데, 원나라의 통치로 그 착취는 더욱 극에 달했다.

 

원나라는 초기 봉건적인 읍(邑)제도를 채택하여 제왕(諸王), 후비(后妃), 공주, 대신들에게 모두 식읍(食邑 : 국가에서 거두어 들이는 조세를 개인이 받아 쓰게 한 고을)을 주었고, 이들 중에는 몇 천 호에서 몇 만 호까지, 한 개 현에서 십여 개 현까지 차지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 지역의 영좌(領座 : 부락이나단체의 우두머리)들은 식읍(食邑)의 소황제가 되어, 봉지(封地 : 제후의 영토)내의 지방 관리를 직접 추천하였고,농민들은 영좌에게 고급 견직품, 세금과 돈을 바쳐야 하였다.

 

원나라 초기의 관원들은 월급이 없어 민간인들을 직접 약탈하거나 혹은 농민들을 착취하였다. 정부의 세금제도는 일찍부터 복잡하고 혼란스러웠으며, 원나라 중엽 이후에는 과세 수입이 20여배로 증가하였다. 농민들이 부담하는 세금에는 하세(夏稅), 추세(秋稅), 정세(丁稅), 지세(地稅), 이호세(二戶稅), 오호세(五戶稅) 등이 있었고, 식초, 술, 소금, 차에 대해서까지 세금을 납부하였다. 원나라의 통치는 각 민족들의 반항에 대처하기 위하여 민족을 4등급으로 분류하여 1등 민족은 몽고인, 2등 민족은 색목인(色目人 : 서역에서 온 외국인), 3등 민족은 한인(漢人), 4등 민족은 남인(南人)이었는데, 남인은 남방의 한족과 각 소수민족이었다. 이것은 원나라가 각 민족을 통치하는 수단으로 민족간의 감시와 한족내부의 분열을 위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민족 차별 하에서 중앙정부 및 군사기관의 수뇌는 반드시 몽고족이었고, 몽고족과 한족 사이에 엄격한 차 별이 있었다. 모든 주요 관직의 실권자는 반드시 몽고인이고, 각 지방 대소 정부 기관의 최고 권력자도 역시 몽고인이었다. 몽고인 다음은 색목인이었고, 한인은 부직이나 중요하지 않은 부서에 있었고, 남인은 원칙상 기용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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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옥진(明玉珍)황제의 향리(鄕里)수주 유림진 쌍림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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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옥진(明玉珍)황제의 향리에 세운 기념회관

원나라 후기에는 통치자들의 부정부패가 매우 심각하여 참기 힘든 상태에까지 이르렀다. 황제부터 대신, 심지어 현관들에게까지 부패와 뇌물이 유행하였고, 이시기에는 자연재해도 매우 심하였다. 1333년의 경기(京歲)지방의 기아민은 40만 호였고, 절강(浙江)지방의 기아민도 60만 호였다.

 

1344년에는 황하가 세 번이나 범람하여 많은 이재민들이 굶주리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핍박을 받고 있던 한인, 남인들은 극심하게반항하게 되었고, 순제 시대만 해도 서번(西番) 백성들의 봉기는 200여 차례가 되었으며, 광서요한봉기군(廣西徭漢峰起軍)은 호남에 진입하고, 상호서요한봉기군(湘西徭漢峰起軍)은 무강(武岡), 전주(全州) 등 지역을 점령하였다.

그리고 요동(동북 3성), 광서 및 운남지방에서의 봉기도 끊이지 않았다. 봉기에 참가한 자들은 농민, 수공업인, 도시의 시민 및 노예들이었다. 1351년 유복(劉福通),두준도(杜遵道)가 영도하는 홍건군(紅巾軍 : 당시 봉기군들이 머리에 붉은 두건을 썼기 때문에 홍건군이라 호칭하였음)이 영주(潁州)에서 의거를 일으키고, 팽영옥(彭瑩玉),서수휘(徐壽輝) 등이 영도하는 홍건군은 호북성 희수, 황강에서 의거하였으며, 각 지방에서는 곽자흥(郭子與), 주원장(朱元璋), 왕권(王權), 맹해마(孟海馬), 지마리(芝麻李), 조군용(趙君用)등이 참가하여 전 중국에 펼쳐졌다.

 

1351년 8월 팽영옥과 서수휘는 홍건군을 창립하여 9월에 호북성 희수(浠水)와 황강(黃岡)을 점령하였고, 기수(蘄水)를 수도로 한 후 서수휘는 황제가 되었다. 국호는 천완(天完, 후에 천계, 천장으로 바꿈)으로, 연호는 치평(治平)으로 하였다. 그 이후 양자강의 상하로 진격하여 큰 승리를 거두어 백성들을 놀라게 하였다. 동시에 유복통의 홍건군이 영도하는 강소성, 안휘성 유역의 농민 봉기는 규모가 크고, 기세도 맹렬하였다.

 

이 시기에 시조께서는 고향사람 천여 명을 소집하여 호북성 수현 서남 낙양진과 유림진 경계의 청림채와 호북성 수현 동남 낙양진과 부하진 경내의 선성산 일대에 주둔시켜 고향을 보호하셨다. 백성들은 시조를 둔장(屯長 : 지역의 수장)으로 추대하였다. 이때 서수휘는 사람을 파견하여 시조를 모셔 오도록 하였다. 시조께서는 서수휘의 홍건군에 가입하여 아문준 부대에 속하게 되었고, 서수휘는 시조에게 병력을 추가로 증가시켜 주었다. 그리하여 시조께서는 면양진(沔陽鎭)을 방어하게 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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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림산

명옥진 황제께서 서수휘의 홍건군에 가입하기 전

고향을 보호하기 위하여 주둔한 북둔,

남둔 병영 요새가 있는 산의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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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림산 북둔 병영요새의 일부     

그 당시 원나라 장령(將領)인 합림도(哈林都)가 이 일대에서 악행하여 백성들에게 큰 피해를 입히고 있어, 시조께서는 그들을 토벌하셨는데, 대전 중 오른쪽 눈에 중상을 입어 한쪽 눈을 잃게 되셨다. 그래서 사람들은 시조를 민할 자(旻瞎者 : 실명한 민씨라는 의미)라고 호칭하였다.

   

 

※ 시조의 원래 성은 민(閔)씨였고, 당시 도탄에 빠진 한민족(漢民族)을 구하기 위해 배화교의 일종인 명교(明敎)가 널리 퍼지게 되자 시조께서는 명교를 독실하게 신봉하였기 때문에 성을 명씨로 바꾸셨고, 시조의 신하들 중에도 성을 명씨로 바꾼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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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림산 북둔 병영요새의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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깃발을 꽂는 돌

1354년 가을, 면양(沔陽) 일대의 폭우로 큰 수재를 입어, 백성들은 풀뿌리와 물고기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다음해 봄이 되어 시조께서는 만여 명의 군병과 선박 50척을 가지고 무협(巫峽) 일대에 가서 양식을 가득히 싣고 돌아와서 백성들을 감격하게 하셨다. 그간의 공적으로 시조께서는 봉국상장군통군도원수(奉國上將軍統軍都元帥)가 되셨다. 1357년 시조께서는 서쪽정벌에 나서셨다.

 

기(夔) 및 만현(萬縣)을 경유하여 4월에 중경에 도착하셨다. 원나라의 수비병들은 크게 두려워하여, 완자도는 밤을 새워 사천성 남충으로 도망쳐 버렸고, 합림도가 출전하였지만 생포되고 말았다. 백성들은 길에 나와 농민군의 입성을 열렬히 환영하였다. 시조께서는 병사들에게 약탈과 노략을 금지하도록 하셨다. 부근의 부대들도 농민군에 투항하는 병사들이 끊이지 않았다. 생포한 합림도는 천완 정부에 넘기셨다. 곧이어노주(瀘州)를 함락하고, 겨울에 서남(叙南) 을 점령하셨다. 천완 정부는 시조를 광서양강도 선위사(廣西兩江道宣慰使)로 봉하였다.

 

1358년 6월 시조께서는 사천의 안악(安岳)으로 진격하여 원나라가 사천에 파견한 이중현, 왕호 및 곽성 등의 주력부대를 격파시키고 성도(成都)를 수복 하셨다. 시조께서는 중경에 돌아와 농촉사 천행성참정(隴蜀四川行省參政)에 임명되셨다.시조께서 사천에 진병하실 무렵 한양에 천도한 천완 정권 내부에 문제가 발생하였다. 어부 출신으로 전투에 능한 아문준이 군정 대권을 장악한 후 거만하게 횡포를 부리며 개인의 야심을 채우기 위하여 서수휘를 암살하려고 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황주(黃州)로 도망친 것이다.

 

그 후 그의 부하로 대음모가인 진우량은 아문준을 살해하였다. 진우량은 아문준을 살해한 후 그가 서수휘를 살해하려 하였으므로 그를 살해한 것은 정당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아문준을 살해한 후 평장(平章 : 벼슬이름) 이라고 자칭하였다. 이 사건은 1357년 9월 시조가 중경에서 군사업무에 매우 바쁠 때에 일어났다. 1358년 군부와 정세가 모두 안정된 후 시조께서는 그 사건에 대하여 진우량이 일을 마구 처리하는 것은 음모를 기도하는 것이라고 상소하였다. 그 후 얼마 안되어 진우량이 진형등의 자객을 보내 은밀히 해를 끼치려 했으나 끝내 가까이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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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둔 병영 요새가 남아있는 성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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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림산 북둔 병영에서 출토된 유물〈기념관 소장〉     

시조께서 광안지역을 정벌하시러 나가신 틈을 타 진형등은 원외랑(벼슬이름) 포옥(鮑玉) 등 7명을 죽이고 도망갔다.

 

원나라 이중현(李仲賢),왕호(王虎),곽성(郭成)등의 부대는 농민군으로부터 큰 타격을 받은 후 1359년 봄에 잔병을 이끌고 섬서성 한중(漢中)까지 후퇴하였다. 이때 원나라 중앙 정권은 수십만 명의 주력 부대를 사천에 파견하여 농민들을 진압하려고 하였으나 시조 부대에 의하여 전부 궤멸되었다.

 

천완 정부는 시조를 표기위상장군 농촉행성좌승(驃騎衛上將軍隴蜀行省左丞)으로 봉하였다. 여름에 이군성(李君誠)을 오면산(五面山)에서 포로로 잡으시고, 서가채(徐家寨)를 습격하셔서 전성(田成), 부덕착악(傅德錯愕)을 패주시켰다. 아문준이 피살당한 후 1359년 겨울 서수휘는 천완 정부의 문무관들을 데리고 한양(漢陽)에서 강주(江州)로 이전하였으나, 당시 강주는 여전히 진우량이 주둔하고 있으면서 반란을 일으켜 서수휘의 관원을 살해하고, 한왕(漢王)이라 자칭하며 서수휘를 납치하였다. 그리하여 천완 정권의 모든 권력은 진우량의 손안에 들어갔다.

 

1360년 5월 진우량은 주원장의 수중에 있는 안휘성 당도(當涂)를 탈취한 후 급박하게 황좌에 오르기 위하여 부대에 납치되어 있던 서수휘를 채석강의 배 위에서 살해하고 바로 황제라고 자칭하면서 국명을 대한(大漢)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홍건군 내부에서의 상호간의 살생은 농민군에 매우 큰 타격을 주었다.

진우량은 서수휘의 이름으로 가장 명령(假裝命令)을 내려, 시조로 하여금 강소성 남경에 와서 합류하라고 하며 음모를 꾀하였다. 진우량의 술책에 걸려 어리석게 남경에 간다면 필연코 진우량에게 피살될 것이며, 가지 않으면 진우량의 토벌을 피할 수 없게 되어 큰 문제였다. 한편 원 정부가 사천에 파견한 주력부대는 이미 궤멸되었지만 중경에서 도망친 원의 잔병들은 사천 낙산에서 혁석(革夕), 조성(趙成)등과 모여 다시 반격할 음모를 꾀하며 그 시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은 사천에서 무시할 수 없는 무장 부대였다. 그리고 사천성의 성도는 아직 원(元)의 수중에 있었다. 그래서 시조께서 병력을 함부로 출동시켜 진우량을 토벌할 여유가 없으셨다.

 

시조께서는 그의 장성들과 의논하여 우선 서수휘가 납치된 상태에서 진우량이 보낸 조서를 다시 그대로 돌려보내고, 진우량이 자칭한 한왕을 반대하셨다. 그리고 서수휘가 피살되었다는 소식을 확인한 후 진우량이 다시 파견한 사자의 목을 베셨다. 진우량이 보낸 서신은 불태워 버리고 삼군은 모두 상복을 입게 하고 서수휘의 상제(喪祭)를 발표하고 묘당을 세워 제사를 올리셨다. 시조께서는 병력을 증가하여 삼협을 방어하도록 하고 음모가들의 왕래를 단절시키셨다. 그리고 당시의 양자강 일대에서는 진우량의 병력이 제일 강하였기 때문에 진우량에 대해 철저한 방어를 하셨다. 11월 구정산(九頂山)에 진격하여 계속 포위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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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촉성 망을 보는 초소

다음해 겨울 만승은 낙산을 공격해 신속히 함락시켰다. 그러나 조성 등이 구정산(九頂山)에 주둔한 채 완강하게 반항하였다. 구정산은 능운산(凌雲山) 또는 청의산(靑衣山)이라고도 불렀다. 구정산은 송나라가 원나라에 항거할 당시의 군사요지였다. 산세가 험악하여 만승은 오랫동안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1361년 춘하 무렵 시조께서는 직접 군병을 거느리고 공격에 나서셨다 만승은 예병(銳兵)을 인솔하여 먼저 성도를 점령해서 군병들의기세는 더욱 높아졌다. 만승은 다시 병력을 이끌고 낙산에 가서 시조와 합류하여 좌우 양측에서 구정산을 습격하였다.

원나라 군대는 대패하게 되었고, 초여름 4월에 완자도와 혁석 및 조성을 생포하여 중경으로 돌아왔다. 생포된 그들은 치평사에서 우대하며 농민들에게 투항하라고 권고하였지만 투항하지 않아 살해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성도(成都), 동천(潼川 : 삼태현)을 평정하시고, 철경성(鐵檠城, 운양현)의 향수복(向壽福)을 무찌르셨다. 이때부터 진우량을 토벌 할 것을 의논하여 격문을 보내고 병사들을 사천성의 삼협근방으로 모으셨다. 시조께서는 지역의 호걸과 부로(父老)들을 모아 놓으시고 “진우량이 서수휘를 살해하여 백성들이 임금이 없게 되었는데 장차 어떻게 해야 하는가”하시며 지휘관의 자리에서 물러나실 것을 네 번이나 준엄하게말씀하시자, 여러 장수들이 “신들은 서수휘 왕실에 충성하는 신하가 아닙니다. 귀신이 이를 알고 죄를 주어도 상관없습니다.”라고 맹세하면서 시조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여러 사람들의 중지에 좇아 시조께서는 1361년 10월 중경에서 왕으로 등극하시고, 서수휘 정권의 국호와 연호를 바꾸지 않으시고, 죽은 서수휘의 시호를 응천계운 헌무황제(應天啓運獻武皇帝)라 하시고, 묘호는 세종으로 하여 마치 순(舜)임금이 요(堯)임금에게서 나라를 물려받은 것과 같이 되었다. 그 후 바로 귀주(貴州)의 준의(遵義), 동재(桐梓), 수양(綬陽) 일대와 사천의 파중, 우두채(牛頭寨, 양평현 서부) 및 장녕(長寧)지역을 평정하셨다.

 

시조께서 병사들을 이끌고 낙산으로 가시던 중 한 장수가 시조께 노주(瀘州) 출신의 유정(劉楨)을 소개하였다. 그는 문장도 잘 쓰고 정치도 잘 아는 재능이 있었지만 당시 관직에 있지 않고 방산(方山)에 거주하고 있었다. 시조께서는 유정을 방문하여 면담한 후 그를 배에 청하여 이문관(理問官)으로 임명하고 조정에 서사(書史)를 강연하면서 정사토론에도 참여토록 하셨다. 시조께서 왕위에 오를 때 유정을 왕국의 참모로 승진시키셨다. 그는 당시의 형세를 판단하여 시조를 황제로 호칭하는 것을 여러 번 건의하였다. 1362년 여름 장수들을 파견하여 사천성 강유, 청천(靑川), 섬서성 한중 및 감숙성 농현(隴縣) 등을 공격하셨다. 겨울에 만승은 병력을 대동하여 한중을 떠나 탑감후보안달부(搨坎侯普顔達夫)를 공격하여 죽이고, 그 도중에 몇 만의 인마를 노획하였다. 1363년 정월 초하루 시조께서는 황제의 자리에 오르셨고, 국호는 대하(大夏)로 하고, 연호는 천통(天統), 역법은 선천(先天)으로 반포하고 예악(禮樂) 형정(刑政), 기강법도를 훌륭히 완비하셔서 국가의 체통을 세우셨고, 수도는 중경으로 하셨다. 황제가 되시면서 문고(文告)를 발포하여 “除暴救民 期靖殘虜 以安黎庶 弔民伐罪之擧 節非 爭地殺人之師”(폭정을 제거하여 백성을 구하고, 나머지 적들을 제거하는 것은 백성을 안정시키고, 백성을 괴롭히는 사람을 처벌하는 것이다. 땅을 빼앗기 위해 살인하는 군대는 절대 아니다.)라고 하셨다.그리고 주나라의 제도를 모방하여 6경(卿)을 설립하셨다. 대수(戴壽)는 6경을 총괄하는 총재(總宰)로 황제의 보좌가 되었는데, 이는 후의 재상에 상당하였다.

 

만승(萬勝)은 사마(司馬)로 임명되어 국가의 군정과 군부(軍賦)를 관장하였고, 장문병(張文炳)은 사공(司空)으로 임명되어 공사를 관장하였으며, 향대형(向大亨)과 막인수(莫仁壽)는 사관(司冠)으로 임명되어 사법, 형옥(刑獄) 및 규찰의 일을 관장하였으며, 오우인(吳友仁)과 추흥(鄒興)은 사도(司徒)로 인명되어 토지와 백성들을 관장하였다. 유정(劉楨)은 종배(宗伯)으로 임명되어 종묘, 제사 등 예의제도를 관장하였다. 한림원(翰林院)을 설립하여 모도남(牟圖南)을 승지(承旨)로 임명하고, 사천장(史天章)을 학사(學士)로 임명하여 태자의 교육을 맡게 하셨다. 또 그 내부에 국자감(國子監)을 설치하여 지방의 생도들을 교육시키셨다. 사직 종묘를 세우시고, 과거 제도도 시행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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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국전폐(大夏國錢幣)

나라를 모두 8도로 나누고, 그 아래에 부(府), 주(州), 현(縣)을 3단계로 설치하셨다. 그리고 한중에 봉천정로장군부(奉天征虜將軍府)를 설치하여 섬서 우측에서 진격할 수 있도록 하고, 호북 의창에 봉천정만장군부(奉天征蠻將軍府)를 설치하여 진우량을 공격하셨다.(8도의 범위는 지금의 사천성의 대부분과 호북성의 서부지역, 귀주성의 일부 지역이 포함된 지역이다. 가장 강성한 시기에는 동쪽은 호북성 의창, 서쪽은 운남성 곤명, 남쪽은 귀주성 준의, 북쪽은 섬서성 한중까지 그 영토였다). 그리고 불교나 도교를 없애고 모두 명교를 믿게 하였고, 또 부역을 철폐하고, 세금도 10분의 1만 부과하도록 하셨다.

 

태묘(太廟)를 세우시고 고조부 랑(郞)을 흠헌(欽憲), 고조모 노(魯)씨를 연경(衍慶), 증조부 자성(子宬)을 장혜(莊惠), 증조모 곽(郭)씨를 공의(恭懿), 조부 여해(如海)를 소순(昭順), 조모 주(朱)씨를 자영(慈寧), 부 학문(學文)을 선무(宣武), 모 조(趙)씨를 정숙(貞淑)이라는 시호를 추증하셨다. 모든 추증된 분들을 황제, 황후로 하셨고, 천자의 예악에 따라 제사를 지내게 하시고, 각종 제사를 모두 융성하게 지내게 하셨다. 또한 황후와 동궁을 세우셨다. 태조께서는 천성이 어지시고, 백성에게 자애로우셨으며, 효성스러우셨고 정성을 다해 어른을 공경하셨다.

 

만승(萬勝)은 추흥(鄒與)에게 3개 분로(分路)를 형성하여 운남에 진병하라고 명령하였다. 만승의 부대는 만 명이 되지 않았지만 의지가 강하고 용감하여 1명이 10명을 감당할 수 있는 병사들이었다. 3월에 만승은 운남 성도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양왕차력첩목아(梁王車力帖木兒)와 염방사관(廉訪司官) 등은 벌써 2일 전에 성을 버리고 도망쳤다. 만승은 사람을 파견하여 초안납(招安納)을 투항하게 하여 수일 내에 많은 원나라의 관리들이 투항하였다. 그리하여 운남에 놀라운 충동을 주었다. 후에 양왕 등이 정찰한 결과 만승의 병력은 불과 8천명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대량의 병력을 규합하여 역공격을 하였다. 만승은 추흥(鄒興)과 이약(李約)의 병력이 도착하지 않아 병력을 이끌고 철수하여 사천으로 다시 돌아왔다.

 

1365년 송원 관제(宋元 官制)를 도입하여 중서성, 추밀원을 설치하셨다. 대수는 좌승상, 만승은 우승상, 향대향과 장문병은 지추밀원(知桓密院)이 되었고, 추흥은 평장으로 성도를, 오우인은 평장으로 보령을, 막인수는 평장으로 기문(夔門)을, 등원향(鄧元享)은 평장으로 통강(通江)을, 두영(竇英)은 참정으로 파주(播州)를, 강각(姜珏)은 참정으로 검남(黔南)을 각 진수하였다. 강각(姜珏)에게는 또 의창을 수비하면서 둔전과 창고를 만들어 국가 양식을 저장하라고 명하셨다. 그리고 주원장과 상호 사신을 파견하여 상호간 좋은 사이로 서로 의지하고 돕는 밀접한 우방국으로서 중원을 회복하는데 협력하기로 약속하셨다. 그리하여 나라를 세우신지 4년이 지나자 서쪽지역은 모두 평정되었다.

 

1366년 2월 6일 시조께서는 신하들이 있는 자리에서 병으로 붕어(崩御)하셨다. 연세는 38세였다. 왕위에 2년, 황제에 4년, 재위(在位) 6년이었다. 붕어 후 시호(諡號)를 흠문소무황제(欽文昭武皇帝)라 하고, 묘호(廟號)를 태조라 하고, 9월 6일 강북 보개산 예릉(叡陵)에 장사하였다. 붕어하시기전에 시조께서는 황제의 자리를 당시 10세인 황태자 승(昇)자 2세조에게 전위하시고, 팽씨(彭氏) 황후(皇后)에게 후사를 부탁하는 조서를 내리니 이는 대통을 바르게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최근 1982년 중국 중경시 강북구(重慶市 江北區) 소재 직물 공장 확장 공사 중 예릉이 발견되고, 현궁지비(玄宮之碑 : 황제의 능에 세운 비), 금은기물(金銀器物), 용포(龍砲) 등 많은 유물이 발굴되었는데, 위 현궁지비의 내용에 의하면 시조를 예릉에 장사 지냈다고 되어 있다. 명씨의 구 족보, 양학가의 명씨실록, 명사(明史)의 명옥진전 등에는 시조의 능이 영창릉(永昌陵)이라고 기재되어 있으나 중국 고대 제왕의 능에 대하여 문헌이나구전(口傳)과 실제가 다른 경우가 있었고, 이번에 발굴된 예릉은 현궁지비의 내용과 곤룡포 등 여러 부장품과 당시의 역사적 상황 등을 종합하여 보면 시조의 능이 확실하다고 중국 정부가 결론을 내렸다. 중국 정부는 예릉을 보물로 지정한 후 기념관을 건설하였고, 현궁지비 등의 유물은 중경시 박물관에 보존하고 있으며, 최근 중경시의 개발계획에 따라 예릉 주변을 중경의 상업 중심지로 개발하면서 예릉만은 철거하지 않고 그 인근을 공원화 하려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한국의 명씨들은 처음에는 예릉이 발견된 것을 모르고 있다가 1995년경 알게되어 그 해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예릉을 참배하여 왔고, 명씨종친회에서는 2001년부터 중국 정부의 협조 하에 매년 음력 2월 6일에 시조에 대한 제사를 올리고 있다. 시조께서 붕어하신지 630여 년 만에 말로만 들어오던 시조의 능이 역사적 현실로 다가왔고 그 앞에서 제사를 모시게 된 후손들에게는 실로 가슴 벅찬 일이 아닐 수 없다.

 

1366년 봄, 유조(遺詔)에 따라 2세조는 황위에 오르셨고, 팽황후께서 수렴청정 하셨다. 그리고 다음 해부터 연호를 개희(開熙)로 바꾸었다. 시조께서 붕어하신 후에 승상 만승과 지원(知院) 장문병의 관계는 서로간의 불만과 의심이 심하여 만승은 비밀리에 사람을 시켜 장문병을 살해하였다. 대신들은 모두 난폭한 성품이어서 상호 양보하지 않았다. 장문병은 시조의 양자 명소(明昭)를 매우 아꼈고 총애하였기 때문에 명소 등이 만승을 궁내에 끌어 들여 살해하였다. 우승상 만승은 덕안부 황파현 사람이었다. 그는 장년기에 지혜와 용기가 일반인을 초월하였다. 그리하여 시조의 총애를 받아 明三(황제와 2세조 다음이라는 의미)으로 불리었다. 또 그는 수년 동안 병력을 이끌고 동서남북 정벌에 나서 많은 적군들을 물리치고 개국공신으로 많은 업적을 남겼다. 2세조는 아직 어렸고 황후가 일을 처리함에 조정 소인들 간의 음모로 장문병과 만승은 참살을 당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유정이 우승상이 되었다.

 

1367년 보령진을 수비하고 있던 평장 오우인은 군 현관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의 내용은 “오랫동안 하주(夏主 : 시조를 지칭하는 말)와 같이 면양(沔陽)에서부터 중경까지 동고하면서 공훈을 세워 나라를 지켰는데 오늘의 사람들은 음모를 꾀하여 공신들을 처참하게 살육까지 하게 되어 나 같은 사람도 그 같은 살육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 할 수 있는가?”라고 하셨다. 그는 도시를 거점으로 모반을 꾀하여 섬서(陝西)의 이사제(李思劑)와 장량필(張良弼)에게 사람을 파견하여 공모하였다. 2세조께서는 몇 번이나 군 병력을 모아 정벌하려고 하셨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1368년 4월 승상 대수는 병력 8만 명을 거느리고 오우인을 정벌하러 떠났다. 오우인은 성내에서 수비하면서 대수에게 이르기를 병력을 사용하면 저항하고 참정 문언빈을 파견하면 곧바로 투항하겠다고 하여 다음날 문언빈을 파견하여 입성시켰다. 오우인은 문언빈에게 양자 명소 등을 주살할 것을 요구하였다. 문언빈은 돌아와서 사실들을 보고하고 조정에서는 명소 등을 모두 잡아서 죽일 계획을 세웠다. 그 후 오우인은 중경에 와서 사죄하였다.

   

 

2세조께서는 누차 특사를 파견하여 오국(吳國, 1364년에 주원장이 명을 세우기 전에 세운 나라)과 여러 나라에 즉위를 통보하였고, 오왕 주원장은 특사를 파견하여 시조 황제의 장례식과 제사에 참석토록 하였고, 또 특사를 파견하여 2세조의 즉위를 축하하였다. 1368년 주원장이 명(明)나라를 세우고 황제로 즉위한다고 하여 2세조께서는 평장 추흥(鄒興)을 파견하여 축하문을 보내셨다. 1369년 명 조정에서는 특사를 사천에 파견하여 큰 나무를 요구하였고 승상 대수는 이를 거절하였다. 그해 10월 명 태조 주원장은 양경(揚璟)을 사천에 보내어 2세조에게 상경하여 명 태조를 면담 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거절하자 다시 서신으로 2세조에게 나라를 내어놓으라고 하였다. 그러나 2세조께서는 이에 복종하지 않으셨다.

 

1370년 4월 명 장군 서달은 김흥왕(金興旺)과 장용(張龍)을 파견하여 한중을 공격하였다. 한중을 수비하고 있던 대하의 장군 유사충(劉思忠)과 지원 김경상(金慶祥)은 모두 투항하였다. 서달은 김흥왕을 그곳에 머물러 있게 하고 장용으로 하여금 성을 수비하도록 하였다. 7월에 대하의 오우인은 한중을 공격하여, 김흥왕을 즉시 격퇴시켰다. 다음날 오우인은 다시 공격을 가하여 김흥왕과 큰 교전을 벌였고, 얼굴에 화살을 맞았으나 그는 화살을 빼고 다시 싸워 이 전투에서 수백 명을 참수하였다. 이때 성내의 수비군병은 3천명 정도였고 오우인의 병력은 3만 명이었다. 김흥왕은 성중을 빠져나가 깊은 골짜기를 통하여 보계(寶鷄) 라는 곳에 도착하여 원병을 청하였다. 오우인은 여전히 성을 포위하고 참호도 파놓고 급진적인 공격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김흥왕은 성문을 꼭 닫고 수비 태세로 저항하였으나 오우인은 발포하고 돌을 던져 적병들이 많이 죽었다. 이때에 서달은 서안(西安)에서 소식을 듣고 즉시 병력을 익문령(益門領)에 소집하여 놓고 우선 부우덕(傅友德)으로 하여금 3천명의 병력을 이끌고 백룡강(白龍江)을 지나 밤중에 목조관(木槽關)을 기습하여 주위 산의 정상과 아래를 모두 점령하였다. 그리고 산 위에 있는 군병들은 횃불을 들고 있으라고 명령하였다. 오우인은 햇불들을 보고 크게 놀라 밤사이에 도주하게 되었다.

 

1370년 명은 특사를 파견하여 운남을 진격하기 위하여 길을 빌려 달라고 하였으나 승상 대수는 허락하지 않았다. 가을에 다시 채철을 파견하여 예물을 바치려고 하였으나 또 다시 거절하였다. 대하가 명과의 화해를 거절하여 겨울에 명 태조는 대하를 정벌하기에 나섰다. 명은 탕화를 서부 정벌군의 장군으로 임명하고 요영충에게 기관(變關)을 공격하라고 명령하였다. 대하의 대수와 향지원은 계곡에 교량을 설치하여 배가 올라오면 나무를 던져 배가 다닐 수 없도록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몇 차례의 싸움에서 대하군은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병력을 후퇴하여 계곡 밖에 머물게 되었다.

 

1371년 봄 명 태조는 군 총사령관 부우덕에게 10만 명의 병력을 주어 계주(階州)와 문주(文州)의 협곡을 따라 주야로 진군하게 하였다. 성도지역의 평장 정세진은 온 백성들을 동원하여 항거하였으나 부우덕은 저항을 격파시키고 쌍도왕 등 18명의 장령들을 생포하고 계주를 함락시켰다. 대하의 촉인(蜀人 : 촉은 사천의 약칭임)들은 백룡강교를 절단시켜 적의 진격을 저지하려고 하였으나 부우덕은 교량을 다시 구축하여 백룡강을 건너 군병들을 계속 진격하게 하였다. 촉인들은 저항도 하지 못하고 놀라서 도망쳐 버렸다. 부우덕의 병력은 면주(綿州)를 경유하여 한강에서 한주(漢州)에 진입하였다. 부우덕이 병력을 쉬게 하려고 하는 중에 탕화가 도착하였다는 소식을 받았다. 대하의 대수 등은 계주와 문주의 수비가 무너졌다는 소문이 들리자 평장 추흥으로 하여금 기관을 수비하게 하고 또 병력을 집중시켜 성도를 구하려고 부우덕의 병력과 수차 싸웠으나 실패하였다. 대수의 장병들은 성도의 성내로 돌아와 견고히 수비만 하고 있었고, 부우덕의 평장 요도가 병력을 합쳐 기관을 공격한 후 곧바로 중경까지 도착하였다.

 

1371년 6월 21일 대하의 2세조와 팽황후는 더 전쟁을 계속하면 국민이 도탄에 빠질 것을 염려하여 국새를 가지고 명 군부대에 가서 나라를 내어 주셨다. 당시 2세조께서는 15세였고, 황위에는 6년동안 계셨다. 시조 황제와 2세조 황제께서 사천지방을 다스리신 것은 1361년부터 1371년까지 모두 11년이었다. 시조께서 세우신 대하가 무너짐으로써 중국대륙은 주원장이 세운 명나라로 통일되게 되었다. 성도는 명 병력들의 포위로 혼란한 상태에 빠져 사망자도 많이 발생하였다. 그들이 획득한 것은 부(府) 7개, 원수부(元帥府) 8개, 선위선무사(宣慰宣撫司) 25개, 주(州) 37개, 현(縣) 67개, 관리 및 장병 모두 5만5백90명, 말과 노새 1만 3천 8백여 필이었다. 부우덕과 요영충은 고덕(高德)을 총지휘자로 파견하여 2세조와 팽황후를 모시고 국새, 금인(金印), 면류관, 의장(儀仗), 은인(銀印) 58개, 동인(銅印) 640개 등을 함께 가지고 상경하였다.

 

2세조께서는 8월에 당시 수도 남경에 도착하여 투항의식을 올리려고 하였으나 명 태조는 “명승은 나이 어려 신하들이 모든 일들을 하였으니 청죄(請罪)의 의식을 면케하라”고 명하였다. 시조와 주원장은 같은 시기에 한민족의 독립을 위해 원나라에 대항한 농민 봉기군의 영도자였기 때문에 명 태조는 2세조에 대하여 관대한 대우를 하였던 것이다.

 

명 태조는 2세조를 귀의후(歸義侯)로 봉하는 등의 대우를 하였으나, 대하 사람들이 2세조와 접촉한다는 소문이 있자 2세조를 고려에 보내게 되었다. 그러면서 고려왕에게 관리(官吏)로도 삼지 말고, 백성(百姓)으로도 삼지 말라(不做官, 不做民)하고, 저택과 노비를 두게 하여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리하여 1372년(공민왕 21년) 2세조께서 모후(母后)이신 팽황후(彭皇后)와 함께 고려에 오시게 되었다. 공민왕은 2세조와 모후(母后)를 개성흥국사(興國寺)에 사시게 하고, 연안, 백천 2개현의 공물(貢物)로 공봉(供奉)하여 국빈으로 예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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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께서 추흥에 건립한 미륵상

팽황후(彭皇后)께서는 부덕(婦德)을 고루 갖추신 분으로 자수(刺繡)에도 능하셔서 이 태조에게 용포(龍袍) 등 궁중 관복(宮中 官服)을 지어 올리셨고, 부인들의 당의(唐衣)와 수식(首飾)도 처음으로 보급하셨다.

 

이 태조는 2세조를 화촉군(華蜀君)으로 봉하였고, 태종(太宗)은 충훈세록(忠勳世錄)을 내렸으며, 팽황후(彭皇后)의 묘를 숙릉(肅陵)이라 하여 국빈으로서의 예를 베플었다. 2세조께서는 총랑 윤희종의 따님, 군부인 파평윤씨(郡夫人 坡平尹氏)를 배위(配位)로 맞이하여 아드님 네 분을 두셨으니 의(義)자 자헌대부 자헌공(資憲大夫 資憲公), 현(傅)자 가정대부 총랑공(嘉靖大夫 摠郞公), 준(俊)자 가정대부 부사공(嘉靖大夫 副使公), 신(信)자 통훈대부 시랑공(通訓大夫 侍郞公)이시고, 이때부터 명씨가 번연(蕃衍)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 그 후 조정으로부터 예우를 받으며 여러 대에 걸쳐 평안한 생활을 해 오다가 임진왜란을 당하여 경향 각지로 분산되게 되었다.

 

자헌공파는 연안, 개성, 강진, 창원 등지로, 총랑공파는 청양, 서천, 태안, 해남, 고흥 등지로, 부사공파는 서울, 영변 등지로, 시랑공파는 연안, 고흥 등지로 이거하여 살다가 산업화 이후 많은 사람이 도시로 이동하여 살고 있다. 현재 서울에 약 6,700명, 충남 대전에 4,200명, 부산, 경남, 울산에 4,100명, 전남, 광주에 3,800명 등 전국에 26,000명의 명씨가 살고 있고, 인구가 많은 성씨순서로 보면 78위를 차지하고 있다. 호적 편제시 본관을 연안(延安), 서촉(西蜀), 해주(海州), 성도(成都), 황해(黃海), 청양(靑陽)등으로 신고하여 본관이 다르게 되어 있지만 모두 같은 자손이다.

 

23세손(世孫) 노 승(魯 昇) 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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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씨 시조 사적(明氏始祖史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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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씨 시조의휘(講 : 돌아가신 임금이나 높은 분의 이름)는 옥(玉)자 진(珍)자이고,

중국 대하(大夏) 태조(太祖) 흡문소무황제(欽文昭武皇帝)이시다.

 

시조께서는 1329년 9월 9일 중국 호북성 수주 수현 매구(지금의 수주시 유림진 고성판)에서 탄생하셨고, 신장이 8척으로 영특하시고 무예가 출중하셨으며 특히 말 위에서 활을 잘 쏘셨고 큰 뜻을 품으시고 주색이나 재물을 탐하지 않으셨다. 당시 중국은 몽고족이금나라와 송나라를 멸망시킨 후 원나라를 세워 백여 년 동안 통치하여 왔다.

 

그들은 잔혹한 민족 압박과 야만적 통치를 실시하였고, 북송 이후 토지의독점 상황은 매우 심각하였는데, 원나라의 통치로 그 착취는 더욱 극에 달했다.

 

원나라는 초기 봉건적인 읍(邑)제도를 채택하여 제왕(諸王), 후비(后妃), 공주, 대신들에게 모두 식읍(食邑 : 국가에서 거두어 들이는 조세를 개인이 받아 쓰게 한 고을)을 주었고, 이들 중에는 몇 천 호에서 몇 만 호까지, 한 개 현에서 십여 개 현까지 차지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 지역의 영좌(領座 : 부락이나단체의 우두머리)들은 식읍(食邑)의 소황제가 되어, 봉지(封地 : 제후의 영토)내의 지방 관리를 직접 추천하였고,농민들은 영좌에게 고급 견직품, 세금과 돈을 바쳐야 하였다.

 

원나라 초기의 관원들은 월급이 없어 민간인들을 직접 약탈하거나 혹은 농민들을 착취하였다. 정부의 세금제도는 일찍부터 복잡하고 혼란스러웠으며, 원나라 중엽 이후에는 과세 수입이 20여배로 증가하였다. 농민들이 부담하는 세금에는 하세(夏稅), 추세(秋稅), 정세(丁稅), 지세(地稅), 이호세(二戶稅), 오호세(五戶稅) 등이 있었고, 식초, 술, 소금, 차에 대해서까지 세금을 납부하였다. 원나라의 통치는 각 민족들의 반항에 대처하기 위하여 민족을 4등급으로 분류하여 1등 민족은 몽고인, 2등 민족은 색목인(色目人 : 서역에서 온 외국인), 3등 민족은 한인(漢人), 4등 민족은 남인(南人)이었는데, 남인은 남방의 한족과 각 소수민족이었다. 이것은 원나라가 각 민족을 통치하는 수단으로 민족간의 감시와 한족내부의 분열을 위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민족 차별 하에서 중앙정부 및 군사기관의 수뇌는 반드시 몽고족이었고, 몽고족과 한족 사이에 엄격한 차 별이 있었다. 모든 주요 관직의 실권자는 반드시 몽고인이고, 각 지방 대소 정부 기관의 최고 권력자도 역시 몽고인이었다. 몽고인 다음은 색목인이었고, 한인은 부직이나 중요하지 않은 부서에 있었고, 남인은 원칙상 기용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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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옥진(明玉珍)황제의 향리(鄕里)수주 유림진 쌍림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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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옥진(明玉珍)황제의 향리에 세운 기념회관

원나라 후기에는 통치자들의 부정부패가 매우 심각하여 참기 힘든 상태에까지 이르렀다. 황제부터 대신, 심지어 현관들에게까지 부패와 뇌물이 유행하였고, 이시기에는 자연재해도 매우 심하였다. 1333년의 경기(京歲)지방의 기아민은 40만 호였고, 절강(浙江)지방의 기아민도 60만 호였다.

 

1344년에는 황하가 세 번이나 범람하여 많은 이재민들이 굶주리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핍박을 받고 있던 한인, 남인들은 극심하게반항하게 되었고, 순제 시대만 해도 서번(西番) 백성들의 봉기는 200여 차례가 되었으며, 광서요한봉기군(廣西徭漢峰起軍)은 호남에 진입하고, 상호서요한봉기군(湘西徭漢峰起軍)은 무강(武岡), 전주(全州) 등 지역을 점령하였다.

그리고 요동(동북 3성), 광서 및 운남지방에서의 봉기도 끊이지 않았다. 봉기에 참가한 자들은 농민, 수공업인, 도시의 시민 및 노예들이었다. 1351년 유복(劉福通),두준도(杜遵道)가 영도하는 홍건군(紅巾軍 : 당시 봉기군들이 머리에 붉은 두건을 썼기 때문에 홍건군이라 호칭하였음)이 영주(潁州)에서 의거를 일으키고, 팽영옥(彭瑩玉),서수휘(徐壽輝) 등이 영도하는 홍건군은 호북성 희수, 황강에서 의거하였으며, 각 지방에서는 곽자흥(郭子與), 주원장(朱元璋), 왕권(王權), 맹해마(孟海馬), 지마리(芝麻李), 조군용(趙君用)등이 참가하여 전 중국에 펼쳐졌다.

 

1351년 8월 팽영옥과 서수휘는 홍건군을 창립하여 9월에 호북성 희수(浠水)와 황강(黃岡)을 점령하였고, 기수(蘄水)를 수도로 한 후 서수휘는 황제가 되었다. 국호는 천완(天完, 후에 천계, 천장으로 바꿈)으로, 연호는 치평(治平)으로 하였다. 그 이후 양자강의 상하로 진격하여 큰 승리를 거두어 백성들을 놀라게 하였다. 동시에 유복통의 홍건군이 영도하는 강소성, 안휘성 유역의 농민 봉기는 규모가 크고, 기세도 맹렬하였다.

 

이 시기에 시조께서는 고향사람 천여 명을 소집하여 호북성 수현 서남 낙양진과 유림진 경계의 청림채와 호북성 수현 동남 낙양진과 부하진 경내의 선성산 일대에 주둔시켜 고향을 보호하셨다. 백성들은 시조를 둔장(屯長 : 지역의 수장)으로 추대하였다. 이때 서수휘는 사람을 파견하여 시조를 모셔 오도록 하였다. 시조께서는 서수휘의 홍건군에 가입하여 아문준 부대에 속하게 되었고, 서수휘는 시조에게 병력을 추가로 증가시켜 주었다. 그리하여 시조께서는 면양진(沔陽鎭)을 방어하게 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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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림산

명옥진 황제께서 서수휘의 홍건군에 가입하기 전

고향을 보호하기 위하여 주둔한 북둔,

남둔 병영 요새가 있는 산의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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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림산 북둔 병영요새의 일부     

그 당시 원나라 장령(將領)인 합림도(哈林都)가 이 일대에서 악행하여 백성들에게 큰 피해를 입히고 있어, 시조께서는 그들을 토벌하셨는데, 대전 중 오른쪽 눈에 중상을 입어 한쪽 눈을 잃게 되셨다. 그래서 사람들은 시조를 민할 자(旻瞎者 : 실명한 민씨라는 의미)라고 호칭하였다.

   

 

※ 시조의 원래 성은 민(閔)씨였고, 당시 도탄에 빠진 한민족(漢民族)을 구하기 위해 배화교의 일종인 명교(明敎)가 널리 퍼지게 되자 시조께서는 명교를 독실하게 신봉하였기 때문에 성을 명씨로 바꾸셨고, 시조의 신하들 중에도 성을 명씨로 바꾼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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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림산 북둔 병영요새의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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깃발을 꽂는 돌

1354년 가을, 면양(沔陽) 일대의 폭우로 큰 수재를 입어, 백성들은 풀뿌리와 물고기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다음해 봄이 되어 시조께서는 만여 명의 군병과 선박 50척을 가지고 무협(巫峽) 일대에 가서 양식을 가득히 싣고 돌아와서 백성들을 감격하게 하셨다. 그간의 공적으로 시조께서는 봉국상장군통군도원수(奉國上將軍統軍都元帥)가 되셨다. 1357년 시조께서는 서쪽정벌에 나서셨다.

 

기(夔) 및 만현(萬縣)을 경유하여 4월에 중경에 도착하셨다. 원나라의 수비병들은 크게 두려워하여, 완자도는 밤을 새워 사천성 남충으로 도망쳐 버렸고, 합림도가 출전하였지만 생포되고 말았다. 백성들은 길에 나와 농민군의 입성을 열렬히 환영하였다. 시조께서는 병사들에게 약탈과 노략을 금지하도록 하셨다. 부근의 부대들도 농민군에 투항하는 병사들이 끊이지 않았다. 생포한 합림도는 천완 정부에 넘기셨다. 곧이어노주(瀘州)를 함락하고, 겨울에 서남(叙南) 을 점령하셨다. 천완 정부는 시조를 광서양강도 선위사(廣西兩江道宣慰使)로 봉하였다.

 

1358년 6월 시조께서는 사천의 안악(安岳)으로 진격하여 원나라가 사천에 파견한 이중현, 왕호 및 곽성 등의 주력부대를 격파시키고 성도(成都)를 수복 하셨다. 시조께서는 중경에 돌아와 농촉사 천행성참정(隴蜀四川行省參政)에 임명되셨다.시조께서 사천에 진병하실 무렵 한양에 천도한 천완 정권 내부에 문제가 발생하였다. 어부 출신으로 전투에 능한 아문준이 군정 대권을 장악한 후 거만하게 횡포를 부리며 개인의 야심을 채우기 위하여 서수휘를 암살하려고 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황주(黃州)로 도망친 것이다.

 

그 후 그의 부하로 대음모가인 진우량은 아문준을 살해하였다. 진우량은 아문준을 살해한 후 그가 서수휘를 살해하려 하였으므로 그를 살해한 것은 정당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아문준을 살해한 후 평장(平章 : 벼슬이름) 이라고 자칭하였다. 이 사건은 1357년 9월 시조가 중경에서 군사업무에 매우 바쁠 때에 일어났다. 1358년 군부와 정세가 모두 안정된 후 시조께서는 그 사건에 대하여 진우량이 일을 마구 처리하는 것은 음모를 기도하는 것이라고 상소하였다. 그 후 얼마 안되어 진우량이 진형등의 자객을 보내 은밀히 해를 끼치려 했으나 끝내 가까이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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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둔 병영 요새가 남아있는 성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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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림산 북둔 병영에서 출토된 유물〈기념관 소장〉     

시조께서 광안지역을 정벌하시러 나가신 틈을 타 진형등은 원외랑(벼슬이름) 포옥(鮑玉) 등 7명을 죽이고 도망갔다.

 

원나라 이중현(李仲賢),왕호(王虎),곽성(郭成)등의 부대는 농민군으로부터 큰 타격을 받은 후 1359년 봄에 잔병을 이끌고 섬서성 한중(漢中)까지 후퇴하였다. 이때 원나라 중앙 정권은 수십만 명의 주력 부대를 사천에 파견하여 농민들을 진압하려고 하였으나 시조 부대에 의하여 전부 궤멸되었다.

 

천완 정부는 시조를 표기위상장군 농촉행성좌승(驃騎衛上將軍隴蜀行省左丞)으로 봉하였다. 여름에 이군성(李君誠)을 오면산(五面山)에서 포로로 잡으시고, 서가채(徐家寨)를 습격하셔서 전성(田成), 부덕착악(傅德錯愕)을 패주시켰다. 아문준이 피살당한 후 1359년 겨울 서수휘는 천완 정부의 문무관들을 데리고 한양(漢陽)에서 강주(江州)로 이전하였으나, 당시 강주는 여전히 진우량이 주둔하고 있으면서 반란을 일으켜 서수휘의 관원을 살해하고, 한왕(漢王)이라 자칭하며 서수휘를 납치하였다. 그리하여 천완 정권의 모든 권력은 진우량의 손안에 들어갔다.

 

1360년 5월 진우량은 주원장의 수중에 있는 안휘성 당도(當涂)를 탈취한 후 급박하게 황좌에 오르기 위하여 부대에 납치되어 있던 서수휘를 채석강의 배 위에서 살해하고 바로 황제라고 자칭하면서 국명을 대한(大漢)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홍건군 내부에서의 상호간의 살생은 농민군에 매우 큰 타격을 주었다.

진우량은 서수휘의 이름으로 가장 명령(假裝命令)을 내려, 시조로 하여금 강소성 남경에 와서 합류하라고 하며 음모를 꾀하였다. 진우량의 술책에 걸려 어리석게 남경에 간다면 필연코 진우량에게 피살될 것이며, 가지 않으면 진우량의 토벌을 피할 수 없게 되어 큰 문제였다. 한편 원 정부가 사천에 파견한 주력부대는 이미 궤멸되었지만 중경에서 도망친 원의 잔병들은 사천 낙산에서 혁석(革夕), 조성(趙成)등과 모여 다시 반격할 음모를 꾀하며 그 시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은 사천에서 무시할 수 없는 무장 부대였다. 그리고 사천성의 성도는 아직 원(元)의 수중에 있었다. 그래서 시조께서 병력을 함부로 출동시켜 진우량을 토벌할 여유가 없으셨다.

 

시조께서는 그의 장성들과 의논하여 우선 서수휘가 납치된 상태에서 진우량이 보낸 조서를 다시 그대로 돌려보내고, 진우량이 자칭한 한왕을 반대하셨다. 그리고 서수휘가 피살되었다는 소식을 확인한 후 진우량이 다시 파견한 사자의 목을 베셨다. 진우량이 보낸 서신은 불태워 버리고 삼군은 모두 상복을 입게 하고 서수휘의 상제(喪祭)를 발표하고 묘당을 세워 제사를 올리셨다. 시조께서는 병력을 증가하여 삼협을 방어하도록 하고 음모가들의 왕래를 단절시키셨다. 그리고 당시의 양자강 일대에서는 진우량의 병력이 제일 강하였기 때문에 진우량에 대해 철저한 방어를 하셨다. 11월 구정산(九頂山)에 진격하여 계속 포위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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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촉성 망을 보는 초소

다음해 겨울 만승은 낙산을 공격해 신속히 함락시켰다. 그러나 조성 등이 구정산(九頂山)에 주둔한 채 완강하게 반항하였다. 구정산은 능운산(凌雲山) 또는 청의산(靑衣山)이라고도 불렀다. 구정산은 송나라가 원나라에 항거할 당시의 군사요지였다. 산세가 험악하여 만승은 오랫동안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1361년 춘하 무렵 시조께서는 직접 군병을 거느리고 공격에 나서셨다 만승은 예병(銳兵)을 인솔하여 먼저 성도를 점령해서 군병들의기세는 더욱 높아졌다. 만승은 다시 병력을 이끌고 낙산에 가서 시조와 합류하여 좌우 양측에서 구정산을 습격하였다.

원나라 군대는 대패하게 되었고, 초여름 4월에 완자도와 혁석 및 조성을 생포하여 중경으로 돌아왔다. 생포된 그들은 치평사에서 우대하며 농민들에게 투항하라고 권고하였지만 투항하지 않아 살해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성도(成都), 동천(潼川 : 삼태현)을 평정하시고, 철경성(鐵檠城, 운양현)의 향수복(向壽福)을 무찌르셨다. 이때부터 진우량을 토벌 할 것을 의논하여 격문을 보내고 병사들을 사천성의 삼협근방으로 모으셨다. 시조께서는 지역의 호걸과 부로(父老)들을 모아 놓으시고 “진우량이 서수휘를 살해하여 백성들이 임금이 없게 되었는데 장차 어떻게 해야 하는가”하시며 지휘관의 자리에서 물러나실 것을 네 번이나 준엄하게말씀하시자, 여러 장수들이 “신들은 서수휘 왕실에 충성하는 신하가 아닙니다. 귀신이 이를 알고 죄를 주어도 상관없습니다.”라고 맹세하면서 시조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여러 사람들의 중지에 좇아 시조께서는 1361년 10월 중경에서 왕으로 등극하시고, 서수휘 정권의 국호와 연호를 바꾸지 않으시고, 죽은 서수휘의 시호를 응천계운 헌무황제(應天啓運獻武皇帝)라 하시고, 묘호는 세종으로 하여 마치 순(舜)임금이 요(堯)임금에게서 나라를 물려받은 것과 같이 되었다. 그 후 바로 귀주(貴州)의 준의(遵義), 동재(桐梓), 수양(綬陽) 일대와 사천의 파중, 우두채(牛頭寨, 양평현 서부) 및 장녕(長寧)지역을 평정하셨다.

 

시조께서 병사들을 이끌고 낙산으로 가시던 중 한 장수가 시조께 노주(瀘州) 출신의 유정(劉楨)을 소개하였다. 그는 문장도 잘 쓰고 정치도 잘 아는 재능이 있었지만 당시 관직에 있지 않고 방산(方山)에 거주하고 있었다. 시조께서는 유정을 방문하여 면담한 후 그를 배에 청하여 이문관(理問官)으로 임명하고 조정에 서사(書史)를 강연하면서 정사토론에도 참여토록 하셨다. 시조께서 왕위에 오를 때 유정을 왕국의 참모로 승진시키셨다. 그는 당시의 형세를 판단하여 시조를 황제로 호칭하는 것을 여러 번 건의하였다. 1362년 여름 장수들을 파견하여 사천성 강유, 청천(靑川), 섬서성 한중 및 감숙성 농현(隴縣) 등을 공격하셨다. 겨울에 만승은 병력을 대동하여 한중을 떠나 탑감후보안달부(搨坎侯普顔達夫)를 공격하여 죽이고, 그 도중에 몇 만의 인마를 노획하였다. 1363년 정월 초하루 시조께서는 황제의 자리에 오르셨고, 국호는 대하(大夏)로 하고, 연호는 천통(天統), 역법은 선천(先天)으로 반포하고 예악(禮樂) 형정(刑政), 기강법도를 훌륭히 완비하셔서 국가의 체통을 세우셨고, 수도는 중경으로 하셨다. 황제가 되시면서 문고(文告)를 발포하여 “除暴救民 期靖殘虜 以安黎庶 弔民伐罪之擧 節非 爭地殺人之師”(폭정을 제거하여 백성을 구하고, 나머지 적들을 제거하는 것은 백성을 안정시키고, 백성을 괴롭히는 사람을 처벌하는 것이다. 땅을 빼앗기 위해 살인하는 군대는 절대 아니다.)라고 하셨다.그리고 주나라의 제도를 모방하여 6경(卿)을 설립하셨다. 대수(戴壽)는 6경을 총괄하는 총재(總宰)로 황제의 보좌가 되었는데, 이는 후의 재상에 상당하였다.

 

만승(萬勝)은 사마(司馬)로 임명되어 국가의 군정과 군부(軍賦)를 관장하였고, 장문병(張文炳)은 사공(司空)으로 임명되어 공사를 관장하였으며, 향대형(向大亨)과 막인수(莫仁壽)는 사관(司冠)으로 임명되어 사법, 형옥(刑獄) 및 규찰의 일을 관장하였으며, 오우인(吳友仁)과 추흥(鄒興)은 사도(司徒)로 인명되어 토지와 백성들을 관장하였다. 유정(劉楨)은 종배(宗伯)으로 임명되어 종묘, 제사 등 예의제도를 관장하였다. 한림원(翰林院)을 설립하여 모도남(牟圖南)을 승지(承旨)로 임명하고, 사천장(史天章)을 학사(學士)로 임명하여 태자의 교육을 맡게 하셨다. 또 그 내부에 국자감(國子監)을 설치하여 지방의 생도들을 교육시키셨다. 사직 종묘를 세우시고, 과거 제도도 시행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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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국전폐(大夏國錢幣)

나라를 모두 8도로 나누고, 그 아래에 부(府), 주(州), 현(縣)을 3단계로 설치하셨다. 그리고 한중에 봉천정로장군부(奉天征虜將軍府)를 설치하여 섬서 우측에서 진격할 수 있도록 하고, 호북 의창에 봉천정만장군부(奉天征蠻將軍府)를 설치하여 진우량을 공격하셨다.(8도의 범위는 지금의 사천성의 대부분과 호북성의 서부지역, 귀주성의 일부 지역이 포함된 지역이다. 가장 강성한 시기에는 동쪽은 호북성 의창, 서쪽은 운남성 곤명, 남쪽은 귀주성 준의, 북쪽은 섬서성 한중까지 그 영토였다). 그리고 불교나 도교를 없애고 모두 명교를 믿게 하였고, 또 부역을 철폐하고, 세금도 10분의 1만 부과하도록 하셨다.

 

태묘(太廟)를 세우시고 고조부 랑(郞)을 흠헌(欽憲), 고조모 노(魯)씨를 연경(衍慶), 증조부 자성(子宬)을 장혜(莊惠), 증조모 곽(郭)씨를 공의(恭懿), 조부 여해(如海)를 소순(昭順), 조모 주(朱)씨를 자영(慈寧), 부 학문(學文)을 선무(宣武), 모 조(趙)씨를 정숙(貞淑)이라는 시호를 추증하셨다. 모든 추증된 분들을 황제, 황후로 하셨고, 천자의 예악에 따라 제사를 지내게 하시고, 각종 제사를 모두 융성하게 지내게 하셨다. 또한 황후와 동궁을 세우셨다. 태조께서는 천성이 어지시고, 백성에게 자애로우셨으며, 효성스러우셨고 정성을 다해 어른을 공경하셨다.

 

만승(萬勝)은 추흥(鄒與)에게 3개 분로(分路)를 형성하여 운남에 진병하라고 명령하였다. 만승의 부대는 만 명이 되지 않았지만 의지가 강하고 용감하여 1명이 10명을 감당할 수 있는 병사들이었다. 3월에 만승은 운남 성도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양왕차력첩목아(梁王車力帖木兒)와 염방사관(廉訪司官) 등은 벌써 2일 전에 성을 버리고 도망쳤다. 만승은 사람을 파견하여 초안납(招安納)을 투항하게 하여 수일 내에 많은 원나라의 관리들이 투항하였다. 그리하여 운남에 놀라운 충동을 주었다. 후에 양왕 등이 정찰한 결과 만승의 병력은 불과 8천명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대량의 병력을 규합하여 역공격을 하였다. 만승은 추흥(鄒興)과 이약(李約)의 병력이 도착하지 않아 병력을 이끌고 철수하여 사천으로 다시 돌아왔다.

 

1365년 송원 관제(宋元 官制)를 도입하여 중서성, 추밀원을 설치하셨다. 대수는 좌승상, 만승은 우승상, 향대향과 장문병은 지추밀원(知桓密院)이 되었고, 추흥은 평장으로 성도를, 오우인은 평장으로 보령을, 막인수는 평장으로 기문(夔門)을, 등원향(鄧元享)은 평장으로 통강(通江)을, 두영(竇英)은 참정으로 파주(播州)를, 강각(姜珏)은 참정으로 검남(黔南)을 각 진수하였다. 강각(姜珏)에게는 또 의창을 수비하면서 둔전과 창고를 만들어 국가 양식을 저장하라고 명하셨다. 그리고 주원장과 상호 사신을 파견하여 상호간 좋은 사이로 서로 의지하고 돕는 밀접한 우방국으로서 중원을 회복하는데 협력하기로 약속하셨다. 그리하여 나라를 세우신지 4년이 지나자 서쪽지역은 모두 평정되었다.

 

1366년 2월 6일 시조께서는 신하들이 있는 자리에서 병으로 붕어(崩御)하셨다. 연세는 38세였다. 왕위에 2년, 황제에 4년, 재위(在位) 6년이었다. 붕어 후 시호(諡號)를 흠문소무황제(欽文昭武皇帝)라 하고, 묘호(廟號)를 태조라 하고, 9월 6일 강북 보개산 예릉(叡陵)에 장사하였다. 붕어하시기전에 시조께서는 황제의 자리를 당시 10세인 황태자 승(昇)자 2세조에게 전위하시고, 팽씨(彭氏) 황후(皇后)에게 후사를 부탁하는 조서를 내리니 이는 대통을 바르게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최근 1982년 중국 중경시 강북구(重慶市 江北區) 소재 직물 공장 확장 공사 중 예릉이 발견되고, 현궁지비(玄宮之碑 : 황제의 능에 세운 비), 금은기물(金銀器物), 용포(龍砲) 등 많은 유물이 발굴되었는데, 위 현궁지비의 내용에 의하면 시조를 예릉에 장사 지냈다고 되어 있다. 명씨의 구 족보, 양학가의 명씨실록, 명사(明史)의 명옥진전 등에는 시조의 능이 영창릉(永昌陵)이라고 기재되어 있으나 중국 고대 제왕의 능에 대하여 문헌이나구전(口傳)과 실제가 다른 경우가 있었고, 이번에 발굴된 예릉은 현궁지비의 내용과 곤룡포 등 여러 부장품과 당시의 역사적 상황 등을 종합하여 보면 시조의 능이 확실하다고 중국 정부가 결론을 내렸다. 중국 정부는 예릉을 보물로 지정한 후 기념관을 건설하였고, 현궁지비 등의 유물은 중경시 박물관에 보존하고 있으며, 최근 중경시의 개발계획에 따라 예릉 주변을 중경의 상업 중심지로 개발하면서 예릉만은 철거하지 않고 그 인근을 공원화 하려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한국의 명씨들은 처음에는 예릉이 발견된 것을 모르고 있다가 1995년경 알게되어 그 해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예릉을 참배하여 왔고, 명씨종친회에서는 2001년부터 중국 정부의 협조 하에 매년 음력 2월 6일에 시조에 대한 제사를 올리고 있다. 시조께서 붕어하신지 630여 년 만에 말로만 들어오던 시조의 능이 역사적 현실로 다가왔고 그 앞에서 제사를 모시게 된 후손들에게는 실로 가슴 벅찬 일이 아닐 수 없다.

 

1366년 봄, 유조(遺詔)에 따라 2세조는 황위에 오르셨고, 팽황후께서 수렴청정 하셨다. 그리고 다음 해부터 연호를 개희(開熙)로 바꾸었다. 시조께서 붕어하신 후에 승상 만승과 지원(知院) 장문병의 관계는 서로간의 불만과 의심이 심하여 만승은 비밀리에 사람을 시켜 장문병을 살해하였다. 대신들은 모두 난폭한 성품이어서 상호 양보하지 않았다. 장문병은 시조의 양자 명소(明昭)를 매우 아꼈고 총애하였기 때문에 명소 등이 만승을 궁내에 끌어 들여 살해하였다. 우승상 만승은 덕안부 황파현 사람이었다. 그는 장년기에 지혜와 용기가 일반인을 초월하였다. 그리하여 시조의 총애를 받아 明三(황제와 2세조 다음이라는 의미)으로 불리었다. 또 그는 수년 동안 병력을 이끌고 동서남북 정벌에 나서 많은 적군들을 물리치고 개국공신으로 많은 업적을 남겼다. 2세조는 아직 어렸고 황후가 일을 처리함에 조정 소인들 간의 음모로 장문병과 만승은 참살을 당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유정이 우승상이 되었다.

 

1367년 보령진을 수비하고 있던 평장 오우인은 군 현관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의 내용은 “오랫동안 하주(夏主 : 시조를 지칭하는 말)와 같이 면양(沔陽)에서부터 중경까지 동고하면서 공훈을 세워 나라를 지켰는데 오늘의 사람들은 음모를 꾀하여 공신들을 처참하게 살육까지 하게 되어 나 같은 사람도 그 같은 살육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 할 수 있는가?”라고 하셨다. 그는 도시를 거점으로 모반을 꾀하여 섬서(陝西)의 이사제(李思劑)와 장량필(張良弼)에게 사람을 파견하여 공모하였다. 2세조께서는 몇 번이나 군 병력을 모아 정벌하려고 하셨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1368년 4월 승상 대수는 병력 8만 명을 거느리고 오우인을 정벌하러 떠났다. 오우인은 성내에서 수비하면서 대수에게 이르기를 병력을 사용하면 저항하고 참정 문언빈을 파견하면 곧바로 투항하겠다고 하여 다음날 문언빈을 파견하여 입성시켰다. 오우인은 문언빈에게 양자 명소 등을 주살할 것을 요구하였다. 문언빈은 돌아와서 사실들을 보고하고 조정에서는 명소 등을 모두 잡아서 죽일 계획을 세웠다. 그 후 오우인은 중경에 와서 사죄하였다.

   

 

2세조께서는 누차 특사를 파견하여 오국(吳國, 1364년에 주원장이 명을 세우기 전에 세운 나라)과 여러 나라에 즉위를 통보하였고, 오왕 주원장은 특사를 파견하여 시조 황제의 장례식과 제사에 참석토록 하였고, 또 특사를 파견하여 2세조의 즉위를 축하하였다. 1368년 주원장이 명(明)나라를 세우고 황제로 즉위한다고 하여 2세조께서는 평장 추흥(鄒興)을 파견하여 축하문을 보내셨다. 1369년 명 조정에서는 특사를 사천에 파견하여 큰 나무를 요구하였고 승상 대수는 이를 거절하였다. 그해 10월 명 태조 주원장은 양경(揚璟)을 사천에 보내어 2세조에게 상경하여 명 태조를 면담 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거절하자 다시 서신으로 2세조에게 나라를 내어놓으라고 하였다. 그러나 2세조께서는 이에 복종하지 않으셨다.

 

1370년 4월 명 장군 서달은 김흥왕(金興旺)과 장용(張龍)을 파견하여 한중을 공격하였다. 한중을 수비하고 있던 대하의 장군 유사충(劉思忠)과 지원 김경상(金慶祥)은 모두 투항하였다. 서달은 김흥왕을 그곳에 머물러 있게 하고 장용으로 하여금 성을 수비하도록 하였다. 7월에 대하의 오우인은 한중을 공격하여, 김흥왕을 즉시 격퇴시켰다. 다음날 오우인은 다시 공격을 가하여 김흥왕과 큰 교전을 벌였고, 얼굴에 화살을 맞았으나 그는 화살을 빼고 다시 싸워 이 전투에서 수백 명을 참수하였다. 이때 성내의 수비군병은 3천명 정도였고 오우인의 병력은 3만 명이었다. 김흥왕은 성중을 빠져나가 깊은 골짜기를 통하여 보계(寶鷄) 라는 곳에 도착하여 원병을 청하였다. 오우인은 여전히 성을 포위하고 참호도 파놓고 급진적인 공격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김흥왕은 성문을 꼭 닫고 수비 태세로 저항하였으나 오우인은 발포하고 돌을 던져 적병들이 많이 죽었다. 이때에 서달은 서안(西安)에서 소식을 듣고 즉시 병력을 익문령(益門領)에 소집하여 놓고 우선 부우덕(傅友德)으로 하여금 3천명의 병력을 이끌고 백룡강(白龍江)을 지나 밤중에 목조관(木槽關)을 기습하여 주위 산의 정상과 아래를 모두 점령하였다. 그리고 산 위에 있는 군병들은 횃불을 들고 있으라고 명령하였다. 오우인은 햇불들을 보고 크게 놀라 밤사이에 도주하게 되었다.

 

1370년 명은 특사를 파견하여 운남을 진격하기 위하여 길을 빌려 달라고 하였으나 승상 대수는 허락하지 않았다. 가을에 다시 채철을 파견하여 예물을 바치려고 하였으나 또 다시 거절하였다. 대하가 명과의 화해를 거절하여 겨울에 명 태조는 대하를 정벌하기에 나섰다. 명은 탕화를 서부 정벌군의 장군으로 임명하고 요영충에게 기관(變關)을 공격하라고 명령하였다. 대하의 대수와 향지원은 계곡에 교량을 설치하여 배가 올라오면 나무를 던져 배가 다닐 수 없도록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몇 차례의 싸움에서 대하군은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병력을 후퇴하여 계곡 밖에 머물게 되었다.

 

1371년 봄 명 태조는 군 총사령관 부우덕에게 10만 명의 병력을 주어 계주(階州)와 문주(文州)의 협곡을 따라 주야로 진군하게 하였다. 성도지역의 평장 정세진은 온 백성들을 동원하여 항거하였으나 부우덕은 저항을 격파시키고 쌍도왕 등 18명의 장령들을 생포하고 계주를 함락시켰다. 대하의 촉인(蜀人 : 촉은 사천의 약칭임)들은 백룡강교를 절단시켜 적의 진격을 저지하려고 하였으나 부우덕은 교량을 다시 구축하여 백룡강을 건너 군병들을 계속 진격하게 하였다. 촉인들은 저항도 하지 못하고 놀라서 도망쳐 버렸다. 부우덕의 병력은 면주(綿州)를 경유하여 한강에서 한주(漢州)에 진입하였다. 부우덕이 병력을 쉬게 하려고 하는 중에 탕화가 도착하였다는 소식을 받았다. 대하의 대수 등은 계주와 문주의 수비가 무너졌다는 소문이 들리자 평장 추흥으로 하여금 기관을 수비하게 하고 또 병력을 집중시켜 성도를 구하려고 부우덕의 병력과 수차 싸웠으나 실패하였다. 대수의 장병들은 성도의 성내로 돌아와 견고히 수비만 하고 있었고, 부우덕의 평장 요도가 병력을 합쳐 기관을 공격한 후 곧바로 중경까지 도착하였다.

 

1371년 6월 21일 대하의 2세조와 팽황후는 더 전쟁을 계속하면 국민이 도탄에 빠질 것을 염려하여 국새를 가지고 명 군부대에 가서 나라를 내어 주셨다. 당시 2세조께서는 15세였고, 황위에는 6년동안 계셨다. 시조 황제와 2세조 황제께서 사천지방을 다스리신 것은 1361년부터 1371년까지 모두 11년이었다. 시조께서 세우신 대하가 무너짐으로써 중국대륙은 주원장이 세운 명나라로 통일되게 되었다. 성도는 명 병력들의 포위로 혼란한 상태에 빠져 사망자도 많이 발생하였다. 그들이 획득한 것은 부(府) 7개, 원수부(元帥府) 8개, 선위선무사(宣慰宣撫司) 25개, 주(州) 37개, 현(縣) 67개, 관리 및 장병 모두 5만5백90명, 말과 노새 1만 3천 8백여 필이었다. 부우덕과 요영충은 고덕(高德)을 총지휘자로 파견하여 2세조와 팽황후를 모시고 국새, 금인(金印), 면류관, 의장(儀仗), 은인(銀印) 58개, 동인(銅印) 640개 등을 함께 가지고 상경하였다.

 

2세조께서는 8월에 당시 수도 남경에 도착하여 투항의식을 올리려고 하였으나 명 태조는 “명승은 나이 어려 신하들이 모든 일들을 하였으니 청죄(請罪)의 의식을 면케하라”고 명하였다. 시조와 주원장은 같은 시기에 한민족의 독립을 위해 원나라에 대항한 농민 봉기군의 영도자였기 때문에 명 태조는 2세조에 대하여 관대한 대우를 하였던 것이다.

 

명 태조는 2세조를 귀의후(歸義侯)로 봉하는 등의 대우를 하였으나, 대하 사람들이 2세조와 접촉한다는 소문이 있자 2세조를 고려에 보내게 되었다. 그러면서 고려왕에게 관리(官吏)로도 삼지 말고, 백성(百姓)으로도 삼지 말라(不做官, 不做民)하고, 저택과 노비를 두게 하여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리하여 1372년(공민왕 21년) 2세조께서 모후(母后)이신 팽황후(彭皇后)와 함께 고려에 오시게 되었다. 공민왕은 2세조와 모후(母后)를 개성흥국사(興國寺)에 사시게 하고, 연안, 백천 2개현의 공물(貢物)로 공봉(供奉)하여 국빈으로 예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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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께서 추흥에 건립한 미륵상

팽황후(彭皇后)께서는 부덕(婦德)을 고루 갖추신 분으로 자수(刺繡)에도 능하셔서 이 태조에게 용포(龍袍) 등 궁중 관복(宮中 官服)을 지어 올리셨고, 부인들의 당의(唐衣)와 수식(首飾)도 처음으로 보급하셨다.

 

이 태조는 2세조를 화촉군(華蜀君)으로 봉하였고, 태종(太宗)은 충훈세록(忠勳世錄)을 내렸으며, 팽황후(彭皇后)의 묘를 숙릉(肅陵)이라 하여 국빈으로서의 예를 베플었다. 2세조께서는 총랑 윤희종의 따님, 군부인 파평윤씨(郡夫人 坡平尹氏)를 배위(配位)로 맞이하여 아드님 네 분을 두셨으니 의(義)자 자헌대부 자헌공(資憲大夫 資憲公), 현(傅)자 가정대부 총랑공(嘉靖大夫 摠郞公), 준(俊)자 가정대부 부사공(嘉靖大夫 副使公), 신(信)자 통훈대부 시랑공(通訓大夫 侍郞公)이시고, 이때부터 명씨가 번연(蕃衍)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 그 후 조정으로부터 예우를 받으며 여러 대에 걸쳐 평안한 생활을 해 오다가 임진왜란을 당하여 경향 각지로 분산되게 되었다.

 

자헌공파는 연안, 개성, 강진, 창원 등지로, 총랑공파는 청양, 서천, 태안, 해남, 고흥 등지로, 부사공파는 서울, 영변 등지로, 시랑공파는 연안, 고흥 등지로 이거하여 살다가 산업화 이후 많은 사람이 도시로 이동하여 살고 있다. 현재 서울에 약 6,700명, 충남 대전에 4,200명, 부산, 경남, 울산에 4,100명, 전남, 광주에 3,800명 등 전국에 26,000명의 명씨가 살고 있고, 인구가 많은 성씨순서로 보면 78위를 차지하고 있다. 호적 편제시 본관을 연안(延安), 서촉(西蜀), 해주(海州), 성도(成都), 황해(黃海), 청양(靑陽)등으로 신고하여 본관이 다르게 되어 있지만 모두 같은 자손이다.

 

23세손(世孫) 노 승(魯 昇) 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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