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씨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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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명씨족보상 명씨의 근원(韓國 明氏族譜상 明氏의 根源)

 

(명씨대종회 명예회장 명노승)

1. 서

한국 명씨는 중국 원나라 말기 중경을 중심으로 대하국을 세웠던 명옥진을 시조로 하고 있다. 명옥진은 1329년에 태어나서 1361년 왕이되었고 1363년 대하국을 세우고 황제가 되었다. 1366년에 38세에 일찍 사망하면서 당시 10세인 명승에게 황제의 자리를 양위하여 명승이 2대 황제가 되어 대하를 통치하다가 1371년 당시 주원장이 세웠던 명나라에게 멸망하고 1372년(고려 공민왕 21년)에 고려로 이거하였다. 한국 명씨는 이때부터 한국에 살게 되어 현재 남한에 약26,000명이 살고 있다.

 

한국으로 이거한 후 약600년간은 한국 명씨와 중국은 단절의 시간이었다. 과거에는 교통의 불편으로 왕래가 거의 없었을 뿐 아니라 한국과 중국은 늘 불편한 관계로 일반인의 출입이 어려웠고 경제적으로도 중국을 왕래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1992년 한국과 중국의 국교 수교 후 많은 왕래가 이루어지기 시작하여 자연히 명씨의 역사가 밝혀지게 되었다.

 

명씨의 관심을 불러 일으킨 것은 1982년에 중국 중경에서 명옥진의 예릉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 계기가 되었다. 명씨들은 이 사실을 국교 수교 후 뒤늦게 알고 중경을 방문하여 예릉에 참배하고, 각종 자료를 받아 검토를 하고 책자도 발간하여 왔다.

중경을 방문한 초창기에는 명옥진에 관한 자료가 많지 않아 명옥진에 관하여는 중경시 박물관이 발간한 “명옥진과 그 묘장연구”가 가장 자세하고 권위가 있는 책자였다.

이 책자의 중요한 내용 중 하나는 명옥진의 원래 성은 민씨였는데 명교를 신봉하여 명씨로 바꾸었다는 것이었다. 물론 과거의 여러 가지 책자의 문헌 기재를 그 근거로 제시하고 있었고, 당시 중경시의 간부들도 모두 이와 같은 견해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동안 명씨 중 이 견해에 대하여 다른 의견을 말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던 중 최근 중국 호북성에 있는 명옥진 탄생지 기념관을 참배하면서 호북성의 명씨들과 만나게 되어 명씨의 원래 성이 과연 무엇이었었는지에 대한 검토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중국에는 약 30만명의 명씨가 살고 있는데 이들의 종친회에서 연구한 결과는 명옥진은 원래 명씨라는 것이다.

그리고 최근에는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면서 중경의 간부들의 의견이 명옥진은 원래 명씨였다는 쪽으로 바뀌고 있다.

 

그래서 최근 몇 년간 필자는 틈틈이 우리 족보와 중국서적들을 검토하여 보았다.

이 문제에 대한 결론은 많은 검토를 거친 후 신중히 내려야 할 것이지만 그동안 검토한 내용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이번에는 우리 족보에 과연 어떻게 기재되었는지에 대하여 우선 살펴 보기로 한다.

우리 족보는 처음 발간한 신사보를 비롯하여 그동안 9회 걸쳐 발간 되었다. 필자가 가지고 있는 1701년의 신사보, 1759년의 기묘보, 1776년의 병신보, 1812년의 임신보를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명씨의 역사에 대한 위 족보의 기록을 발췌하면 우리 선조들이 한국명씨의 근원을 어덯게 보았는지가 들어 난다고 본다.

 

 

2. 족보상의 기재

가. 신사보의 기재

신사보는 “명씨사보 합부”라는 이름으로 1권으로 발간되었는데 과거에 합격하여 보령현감을 하였던 명정구가 중심이 되어 발간하였다. 그러나 이 족보에는 명옥진 이후에 대한 기록만 있고 그 이전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아래에서 보는 바와 같이 신사보 발간시 발문을 썼던 신규가 명씨의 근원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았던 것에 대한 의문제기가 기묘보 서문에 나오고, 병신보에도 같은 의문제기 기록이 나온다.

 

나. 기묘보의 기재

“서촉명씨족보”라는 이름으로 1권으로 발간되었다.

이 족보의 첫 부분에 명옥진 이전의 명씨의 근원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필자는 이 기록을 처음 보면서 전율을 느꼈다. 이렇게 중요한 기록을 왜 명씨들은 아무도 말하는 사람이 없었던 것인가! 그것은 오래된 족보가 일반에게 배포되지 않았고 일부 소지했던 사람도 모두 한자로 되어 있어 읽을 수 없었기 때문 이라고 생각된다.너무도 중요하여 관계부분 원문 전부를 소개하기로 한다.

 

살펴보건대, 남사(南史) 「명승소(明僧昭)」전에 말하기를, “그 선조는 오태백(吳太伯)의 후예이고, 백리해(百里奚)의 아들 맹명(孟明)으로서 이름을 가지고 성으로 삼았다.”라고 하였다. 그 후에 명씨가 중국 역사에 실린 것은 매우 드물다. 다만, 승소의 아들 산빈(山賓)이 당(唐)나라 때 명성이 있었고, 숭엄(崇儼)이 의약(醫藥)과 양생(養生)의 기술로 송(宋)나라 때 이름이 드러났으며, 참정(參政) 호(鎬)가 공업(功業)으로 지원(至元) 연간에 드러났고, 우겸(于謙)이 문장으로 (세상에) 명성이 있었을 뿐이다. 그 나머지는 들어보지 못했다.

 

또 살펴보건대, 사기(史記), 「오세가(吳世家)」에 “태백(太伯)이 죽고 자식이 없자 (태백의 아우인) 중옹(仲雍)이 왕위를 계승하였다.”라고 하였다. 중옹(仲雍)의 후손들이 별도로 우(虞)땅에 봉해진 자가 있어서 백리해(百里奚)가 나왔으니, 대개 이들은 중옹(仲雍)의 후손들이다. 그런 즉 명씨(明氏)의 선조는 그 내력이 오래된 것이다. 중국에 있을 때 맹명(孟明) 이전의 조상들은 세보(世譜)가 다른 지역에 떠돌며 침체되었던 나머지 비록 전해진 것은 없으나, 동쪽으로(우리나라) 귀의한 이후에는 그 세계(世系)가 면면히 이어져 끊어지지 않았으니, 이것은 아마도 중국인들이 옮겨와서 동쪽으로 귀의했던 것과 한 예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일찍이 서관 종씨(西關宗氏)가 족보를 정리할 때 직강(直講) 신규(申奎)가 발문을 지으면서 맹명(孟明) 으로 말미암아 성을 얻게 된 것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으니, 상고하고 조사하지 못해서 그런 것인가, 아니면 이미 상고하고 검토해 봤으나 너무 오래되어 밝히기 어려웠으므로, 생략해서 적었기 때문인 것인가.

이상의 기록을 종합하면 오태백,중옹, 백리해, 맹명,명으로 이어지는 명옥진 이전의 명씨 역사가 있는 것이다.

 

다. 병신보의 기재

“연안명씨보”상,하 2권으로 발간되었다.

서문(18정)에 “우리 명씨는 후직에서 계출되어 맹명의 시대에 이름을 성으로 쓰기 시작하여”라는 표현 뒤에 기묘보와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후직은 주나라의 시조로 백리해보다 앞의 인물이기 때문에 병신보는 기묘보보다 한 걸음 더 거슬러 올라간 기록을 하고 있다.

그리고 “옛 기록에 이러한 것이 기록되어 있는데 신사보에 기록되지 않은 것이 미쳐 옛 것을 몰라서 그런 것인가, 아니면 세대가 멀어 규명하기 어렵다고 생각하여 누락시킨 것인가”라는 의문을 또 한번 제기하고 있다

 

라. 임신보의 기재

“서촉명씨족보”라는 이름으로 천,지,인 3권이 발간 되었다.

서문(1정)에 “우리 명씨는 후직에게서 계출되어 백리해의 아들 맹명에게 이어져 이름으로서 성을 삼았으니 그 실제 사적은 상고할 수 없으나 면면히 전해지고 있다.”고 기재되어 있다.

 

3.결어

이상으로 한국 명씨 족보에 나타난 명옥진 이전의 명씨 역사에 대한 기록을 살펴 보았다.

종합하면 명씨는 후직-오태백-중옹-백리해-맹명의 후손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내용은 옛 기록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상의 내용만 가지고 한국 명씨의 근원을 단언하기는 어렵겠지만 이 기록은 앞으로 명씨 역사를 확정하는데 결정적인 자료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명옥진에 관련된 많은 서적들을 연구, 검토를 한 연후에만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한국 명씨족보상 명씨의 근원(韓國 明氏族譜상 明氏의 根源)

 

(명씨대종회 명예회장 명노승)

1. 서

한국 명씨는 중국 원나라 말기 중경을 중심으로 대하국을 세웠던 명옥진을 시조로 하고 있다. 명옥진은 1329년에 태어나서 1361년 왕이되었고 1363년 대하국을 세우고 황제가 되었다. 1366년에 38세에 일찍 사망하면서 당시 10세인 명승에게 황제의 자리를 양위하여 명승이 2대 황제가 되어 대하를 통치하다가 1371년 당시 주원장이 세웠던 명나라에게 멸망하고 1372년(고려 공민왕 21년)에 고려로 이거하였다. 한국 명씨는 이때부터 한국에 살게 되어 현재 남한에 약26,000명이 살고 있다.

 

한국으로 이거한 후 약600년간은 한국 명씨와 중국은 단절의 시간이었다. 과거에는 교통의 불편으로 왕래가 거의 없었을 뿐 아니라 한국과 중국은 늘 불편한 관계로 일반인의 출입이 어려웠고 경제적으로도 중국을 왕래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1992년 한국과 중국의 국교 수교 후 많은 왕래가 이루어지기 시작하여 자연히 명씨의 역사가 밝혀지게 되었다.

 

명씨의 관심을 불러 일으킨 것은 1982년에 중국 중경에서 명옥진의 예릉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 계기가 되었다. 명씨들은 이 사실을 국교 수교 후 뒤늦게 알고 중경을 방문하여 예릉에 참배하고, 각종 자료를 받아 검토를 하고 책자도 발간하여 왔다.

중경을 방문한 초창기에는 명옥진에 관한 자료가 많지 않아 명옥진에 관하여는 중경시 박물관이 발간한 “명옥진과 그 묘장연구”가 가장 자세하고 권위가 있는 책자였다.

이 책자의 중요한 내용 중 하나는 명옥진의 원래 성은 민씨였는데 명교를 신봉하여 명씨로 바꾸었다는 것이었다. 물론 과거의 여러 가지 책자의 문헌 기재를 그 근거로 제시하고 있었고, 당시 중경시의 간부들도 모두 이와 같은 견해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동안 명씨 중 이 견해에 대하여 다른 의견을 말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던 중 최근 중국 호북성에 있는 명옥진 탄생지 기념관을 참배하면서 호북성의 명씨들과 만나게 되어 명씨의 원래 성이 과연 무엇이었었는지에 대한 검토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중국에는 약 30만명의 명씨가 살고 있는데 이들의 종친회에서 연구한 결과는 명옥진은 원래 명씨라는 것이다.

그리고 최근에는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면서 중경의 간부들의 의견이 명옥진은 원래 명씨였다는 쪽으로 바뀌고 있다.

 

그래서 최근 몇 년간 필자는 틈틈이 우리 족보와 중국서적들을 검토하여 보았다.

이 문제에 대한 결론은 많은 검토를 거친 후 신중히 내려야 할 것이지만 그동안 검토한 내용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이번에는 우리 족보에 과연 어떻게 기재되었는지에 대하여 우선 살펴 보기로 한다.

우리 족보는 처음 발간한 신사보를 비롯하여 그동안 9회 걸쳐 발간 되었다. 필자가 가지고 있는 1701년의 신사보, 1759년의 기묘보, 1776년의 병신보, 1812년의 임신보를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명씨의 역사에 대한 위 족보의 기록을 발췌하면 우리 선조들이 한국명씨의 근원을 어덯게 보았는지가 들어 난다고 본다.

 

 

2. 족보상의 기재

가. 신사보의 기재

신사보는 “명씨사보 합부”라는 이름으로 1권으로 발간되었는데 과거에 합격하여 보령현감을 하였던 명정구가 중심이 되어 발간하였다. 그러나 이 족보에는 명옥진 이후에 대한 기록만 있고 그 이전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아래에서 보는 바와 같이 신사보 발간시 발문을 썼던 신규가 명씨의 근원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았던 것에 대한 의문제기가 기묘보 서문에 나오고, 병신보에도 같은 의문제기 기록이 나온다.

 

나. 기묘보의 기재

“서촉명씨족보”라는 이름으로 1권으로 발간되었다.

이 족보의 첫 부분에 명옥진 이전의 명씨의 근원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필자는 이 기록을 처음 보면서 전율을 느꼈다. 이렇게 중요한 기록을 왜 명씨들은 아무도 말하는 사람이 없었던 것인가! 그것은 오래된 족보가 일반에게 배포되지 않았고 일부 소지했던 사람도 모두 한자로 되어 있어 읽을 수 없었기 때문 이라고 생각된다.너무도 중요하여 관계부분 원문 전부를 소개하기로 한다.

 

살펴보건대, 남사(南史) 「명승소(明僧昭)」전에 말하기를, “그 선조는 오태백(吳太伯)의 후예이고, 백리해(百里奚)의 아들 맹명(孟明)으로서 이름을 가지고 성으로 삼았다.”라고 하였다. 그 후에 명씨가 중국 역사에 실린 것은 매우 드물다. 다만, 승소의 아들 산빈(山賓)이 당(唐)나라 때 명성이 있었고, 숭엄(崇儼)이 의약(醫藥)과 양생(養生)의 기술로 송(宋)나라 때 이름이 드러났으며, 참정(參政) 호(鎬)가 공업(功業)으로 지원(至元) 연간에 드러났고, 우겸(于謙)이 문장으로 (세상에) 명성이 있었을 뿐이다. 그 나머지는 들어보지 못했다.

 

또 살펴보건대, 사기(史記), 「오세가(吳世家)」에 “태백(太伯)이 죽고 자식이 없자 (태백의 아우인) 중옹(仲雍)이 왕위를 계승하였다.”라고 하였다. 중옹(仲雍)의 후손들이 별도로 우(虞)땅에 봉해진 자가 있어서 백리해(百里奚)가 나왔으니, 대개 이들은 중옹(仲雍)의 후손들이다. 그런 즉 명씨(明氏)의 선조는 그 내력이 오래된 것이다. 중국에 있을 때 맹명(孟明) 이전의 조상들은 세보(世譜)가 다른 지역에 떠돌며 침체되었던 나머지 비록 전해진 것은 없으나, 동쪽으로(우리나라) 귀의한 이후에는 그 세계(世系)가 면면히 이어져 끊어지지 않았으니, 이것은 아마도 중국인들이 옮겨와서 동쪽으로 귀의했던 것과 한 예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일찍이 서관 종씨(西關宗氏)가 족보를 정리할 때 직강(直講) 신규(申奎)가 발문을 지으면서 맹명(孟明) 으로 말미암아 성을 얻게 된 것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으니, 상고하고 조사하지 못해서 그런 것인가, 아니면 이미 상고하고 검토해 봤으나 너무 오래되어 밝히기 어려웠으므로, 생략해서 적었기 때문인 것인가.

이상의 기록을 종합하면 오태백,중옹, 백리해, 맹명,명으로 이어지는 명옥진 이전의 명씨 역사가 있는 것이다.

 

다. 병신보의 기재

“연안명씨보”상,하 2권으로 발간되었다.

서문(18정)에 “우리 명씨는 후직에서 계출되어 맹명의 시대에 이름을 성으로 쓰기 시작하여”라는 표현 뒤에 기묘보와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후직은 주나라의 시조로 백리해보다 앞의 인물이기 때문에 병신보는 기묘보보다 한 걸음 더 거슬러 올라간 기록을 하고 있다.

그리고 “옛 기록에 이러한 것이 기록되어 있는데 신사보에 기록되지 않은 것이 미쳐 옛 것을 몰라서 그런 것인가, 아니면 세대가 멀어 규명하기 어렵다고 생각하여 누락시킨 것인가”라는 의문을 또 한번 제기하고 있다

 

라. 임신보의 기재

“서촉명씨족보”라는 이름으로 천,지,인 3권이 발간 되었다.

서문(1정)에 “우리 명씨는 후직에게서 계출되어 백리해의 아들 맹명에게 이어져 이름으로서 성을 삼았으니 그 실제 사적은 상고할 수 없으나 면면히 전해지고 있다.”고 기재되어 있다.

 

3.결어

이상으로 한국 명씨 족보에 나타난 명옥진 이전의 명씨 역사에 대한 기록을 살펴 보았다.

종합하면 명씨는 후직-오태백-중옹-백리해-맹명의 후손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내용은 옛 기록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상의 내용만 가지고 한국 명씨의 근원을 단언하기는 어렵겠지만 이 기록은 앞으로 명씨 역사를 확정하는데 결정적인 자료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명옥진에 관련된 많은 서적들을 연구, 검토를 한 연후에만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